민족상잔… 지금도 생생한 6·25 화랑무공훈장 수상, 소령으로 제대
20사단의 수색중대장으로 최전방에 나가 정확하게 적군을 발견하고 상부에 보고해 포부대를 이끌어 전멸케 한 공적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윤갑이씨(63. 보은 교사) 지금도 자리에 누우면, 능선을 사이에 두고 낮에는 아군과 적군이서로 대치하다 밤이 되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육박전을 벌이던 그 치열했던 접전이 생생하다.가까이에 전우가 죽어가는 모습을 뒤로하고 전진해야 했던 그런 아비규환의 팔공산 전투 - 윤갑이씨는 소위로 임관받아 7사단 5연대로 팔공사 전투에 배속되었는데, 16일간의 전투가 끝난 후에는 자신과 함께 배속되었던 소위 33명중 4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드때를 회상하는 윤갑이씨는 조국을 위해 싸우다 산하에 이름없이 묻혀진 전우들을 생각하며 지금도 눈시울을 붉힌다. 윤갑이씨는 20살 되던 해인 1946년 보은농업중학교 재학중 청주 7연대로 입대한다. 그러다가 육군보급본창에 있을 때 중사에서 이등상사로 지급하면서 6·25사변이 일어나고 9월4일 소위로 임관, 팔공산 전투에 참가했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영천, 안동, 원주전투를 치르며 춘천으로 진격했고 다시 철원, 평양, 개천, 덕천, 묘향산까지 진격해 올라갔지만, 묘향산에서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밀리기 시작해, 급기야 완전 포위 당해 많은 전우들을 잃고 부대는 뿔뿔히 흩어졌다.
곡절끝에 3·8선을 넘어서야 겨우 부대를 찾을 수 있었고, 재편성한 부대와 함께 다시 진격을 시작했는데, 영월 옥동전투에서 그만 왼쪽 하퇴부 관통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부상후 병원을 옮겨다니다 11개월여만에 퇴원해 보병학교 초등군사반에서 교육후 대위로, 삼관구사령부를 거쳐 소양교육대 대대장으로 배속받았고, 다시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 졸업후에 소령으로 제대했다.
제대를 한 것은 전투시 입은 부상으로 거동이 부자유스러워 계급이 올라갈수록 지워지는 무거운 책임을 감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는 지휘관이건 사병이건 모두가 내 한몸 희생해 막지않으면 나라의 운명이 흔들린다는 마음자세로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며 "때문에 앞으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질 젊은세대들이 좀더 자숙하여 주어진 자기임무에 충실했으면 하는 것이 우리 전쟁세대들이 전후세대들에게 바라는 마음"이라고 당부한다.
육군본부에 신청한 상이군경 등록이 지난 4월 받아들여졌다는 윤소령은 "아직도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는 국가유공자들에게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이 주어졌으면 한다"고 바램을 말한다. 재건 국민운동 보은군지회장, 농지개량조합장, 산림조합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한 노인회 군지부 사무국장으로 있는 윤갑이씨는 부인 이종순씨(57)와의 사이에 2남6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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