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 상이용사 김상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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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상이용사 김상준씨
  • 송진선
  • 승인 1992.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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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유월이면 전쟁의 참상이… 목숨을 건 대가는 어머니의 영정과 아픈 상흔뿐
해마다 6월이 되면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며 몸살을 앓는 참전자들은 그때의 총성이 될리는 듯 6월의 하늘을 응시하며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곤 한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긴박감을 안고 전쟁터에 몸을 던졌던 김상준씨(62, 외속 봉비)는 국가 보훈대상자들이 국가 보조금이 적다고 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씁쓸하기 그지없다.

북의 총부리가 남쪽을 향하고 무참히 희생되었던 민족의 원혼이 공중 떠돌았던 휴전무렵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군에 입대해 훈련 받을 여지없이 곧바로 보병 수도사단에 편입, 강원도 금화지구에 배치되었다.

김상준씨가 배치되었던 금화지구의 코끼리 능선은 아군의 최전초부대로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특히 산속에 화기와 병기창고가 있어 기차까지 드나들었던 적의 최대 전초기지이자 요지인 오성산 정복을 위해 필사적인 공방전으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며칠이나 했을가 53년 7월27일 휴전을 며칠 앞둔 7월13일 밤10시경 김상준시를 제외한 소속 부대원 모두가 전멸하는 기습을 당했다. 이때 김씨는 왼쪽 하퇴부에 총알이 관통하고 턱밑으로 총알이 관통하는 부상을 입고 후방인 중대본부까지 홀로 후퇴해야 했다.

김씨가 입은 상처는 매우 깊어 대구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을 때 턱밑에 파편이 박혀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수술하지 않은 채 약 40년이란 세우러이 지난 지금 턱밑에 있는 파편과 다리에 깊게 패인 전쟁의 상흔이 비만 올라치면 쑤시고 시큰거려 그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59개월간의 근복무동안 특등사수로 활약해 받은 사격기장과 , 당시 육군준장 한신씨로부터 받은 빛바랜 공로표창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김상준씨는 "전쟁은 정말 비극입니다.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킨 뒤의 보답은 아들의 무사귀향을 빌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정과 총상으로 얻은 상처의 후유증 뿐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피로써 나를 지킨 것은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렇지못한 저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누구의 피는 값진 것이고, 상처가 아물어 걷고 숨쉬는데 지장이 없다고 해서 가치가 하락된다는 것은 정말 서운한 일입니다. 국가로부터 국가 유공자로 선정되어, 지원을 받는 것이 형편없다고 해서 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울분을 금치 못한다"는 김상준씨- 해마다 6월이 오면 전쟁의 참상에 몸서리치면서도 인내를 미덕으로 정신적 고통을 견딘다.

형편이 어려워 5남1녀의 자식들을 겨우 한글만 깨우치게 하는 정도의 교육만 받게 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김상준씨는 자신만을 믿고 따라분 부인 김을순씨와 8백평 남짓한 땅을 일구며 인고의 삶을 살고 있다.


(금주에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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