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북면 눌곡리 연병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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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북면 눌곡리 연병예씨
  • 보은신문
  • 승인 1992.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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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 종가살림의 대들보 영해 박씨 집성촌의 종가집 며느리
종가(宗家)의 며느리는 집안살림의 중추로서 집안을 번성시키는 열쇠요, 옛날 가문높은 종가 며느리의 딸 한마디는 바로 후손들의 행동의 지표였다. 회북면 눌곡리 영해 박씨 집성촌의 종가 며느리로서 문중 대소사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연병예씨(69).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국민학교에 다니는 손자도 있는 할머니이지만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처지라 언제나 그 앞에서는 어린애이고 행동거지가 조심스럽다.

충남 신탄진에서 서당의 훈장으로 학문을 탐구하던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7남1녀의 고명딸로 자란 연씨가 21살의 나이에 5형제의 맏이이며 11대 종손인 부군 박병찬씨(70)에게 시집와서 어렵고 힘든 종가살림을 배우고 집안의 전통에 인숙해지기까지 남몰래 쏟은 눈물이 하루에도 서너 대접은 족히 될 정도였다고.

그리고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시동생까지 연씨가 추스리고 꾸려나가야 하는 살림살이의 문지방은 매우 높았고, 집안형편이 어려워 1년에 수차례씩 지내야 하는 제사의 음식이 빈약할 수 밖에 없어 언제나 죄송스러웠으나 '힘 닿는대로 정성을 다하면 된다'는 시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심성의껏 손수만든 약과, 강정 등을 차려냈었다고.

밤하늘의 별도 조는 새벽녘까지 베짜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열심히 일해 네 명이나 되는 시동생들의 학교공부와 혼인에 이르기까지 그 뒷바라지에 힘쓴 연병예씨 한때는 연씨의 자식들까지 포함해 20명 정도나 되는 대가족이 함께 살기도 했는데 밥상을 차리면 적어도 상이 6∼7개나 필요할 정도였지만 마음만은 항상 풍요롭고 화목한 가정생활이었다고 회고한다.

힘써 모은 살림을 쪼개어 시동생들을 한 집 한 집 분가시켰을 때는 시동생과 동서들이 연씨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며 헤어짐을 아쉬워해 '내가 할 일을 했구나'하는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고.

11대 종가 며느리로 집안 살림살이만으로도 벅찼지만 70년대 새마을 운동을 벌일 때에는 새마을 부녀회장직을 맡아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절미저축 운동을 장려하는데 앞장섰으며 항상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교육에도 참가한, 새마을지도자 중앙연수원 4기 수료생이기도 하다. 밤새 불편을 겪을 까봐 90세된 시어머니와 한방에서 기거하며 극진히 봉양하는 대가의 맏며느리 연병예씨는 "우리 조상들이 가꿔온 전통을 요즘과 같은 일회용 사고방식과 비교하면 안돼죠.

부모의 제사상에도 뭐든지 사다쓰는, 정성이 빠진 요즘의 젊은 주부들을 탓하기보다는 웃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경애정신은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집안의 가풍이 있듯이 나라의 국풍으로 전승되어야 한다고 본다"며 따가운 일침을 놓는다.


(금주에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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