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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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유정
  • 양승윤(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4.07.25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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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세 사람들에게 노년유정(老年有情)으로 전해오는 다산 정약용의 장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가 있다. ‘노인의 한 가지 즐거움’으로 풀어 쓰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해지는 것은 필요 없는 것은 보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보라는 뜻이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은 쓸데없는 작은 말까지 들으려 하지 말고 큰 말만 들으라는 것이며, 걸음걸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은 나이 든 사람을 쉬 알아보게 하려는 조물주의 배려이며,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것은 살아온 세월을 모두 다 기억하지 말고 좋은 일과 아름다운 추억 만을 기억하라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실학자이자 저술가였다. 500여 권의 저서 중 목민심서(牧民心書)가 우뚝하다.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면 요순(堯舜)시대의 법으로도 살 수 없으니 나라가 서둘러서 병들고 배고픈 백성들을 구휼(救恤)해야 한다고 썼다.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하면서 남긴 역작인데, 그 큰 갈래는 개혁과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시집 송파수작(松波酬酌)에 수록되어 있다는 노인일쾌사는 다산이 71세 때 썼다. 75세까지 수(壽)한 그는 요즘 나이로 치면 백 살까지 산 셈이다. 조선조 오백 년 스물일곱 분 임금님의 평균 수명이 겨우 47세였으니까. 장수한 다산이 인생의 마지막 고개를 넘으면서 느낀 쾌사(快事)가 진정한 즐거움이었을까, 아니면 허허로움이었을까. 
  인생에서 절대 피할 수 없는 두 가지는 ‘세금과 죽음’이라는 미국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살아있는 한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세금과 죽음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세금을 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나이 들어 죽는다는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죽음에 한 발씩 더 다가가는 늙어감은 사후 세계를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두려운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각급 교과서에 많이 등장하는 고전의 한 구절이다. 그리고 독백으로 이어진다. “죽는다는 것은 잠을 자는 것, 잠이 들면 꿈을 꾸겠지”. 이는 죽음에 이르는 ‘두려움’을 짐짓 잠들어 꿈꾸는 것으로 미화한 것이리라. 
  수명이 크게 늘어 노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생활환경이 축소된다.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점차로 희미해진다. 그래도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노욕을 부리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런 사람들은 추해 보인다. 나이 50세를 뜻하는 면요(免夭)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면요를 ‘살 만큼 산 나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모두 칠십을 넘어 팔십 구십을 살아 100세 시대로 향하고 있다. 어렵게 사는 사람도 많고 홀로된 사람도 많다. 이들 중 일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경제적 궁핍과 건강 악화와 외로움이 주된 이유다. 
  고전음악 애호가인 선배 한 분이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영화의 주인공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 얘기를 보내주셨다. ‘모든 남자가 증오했고, 모든 여자가 사랑한 남자’라는 부제를 달고 2013년에 개봉된 이탈리아영화다.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가였던 그는 어느 날 호화로운 공연장에서 상류사회 인사들을 잔뜩 모아놓고 연주회를 가졌다. 그런데 연주 도중에 바이올린 줄 하나가 끊어져 버렸다. 파가니니는 놀라지 않고 남은 세 줄로 연주를 계속했다. 격정적인 연주였던지 잠시 후 또 한 줄이 끊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한 줄이 끊어져 버렸다. 이제 한 줄만 남게 된 것이다. 청중들은 모두 긴장하여 숨을 죽였다. 
  그러나 파가니니는 청중들을 응시하며 잠시 연주를 멈추었을 뿐 다시 마지막 한 줄로 완벽한 연주를 끝마쳤다. 다산과 같은 시대를 산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가 남긴 <G선 상의 아리아>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G선은 바이올린 네 줄(絃) 중에서 가장 낮은 음역(音域)을 가진 줄이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평생을 의지했던 줄이 하나씩 끊어져 나간다. 사랑의 줄, 명예의 줄, 부귀의 줄 등등. 모든 줄이 다 끊어져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작지만 최상의 아리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G선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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