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참전 희생자 서봉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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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참전 희생자 서봉구씨
  • 송진선
  • 승인 1991.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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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의지 「살아서 고국으로」 감격스런 8·15
일제징병의 희생양으로 그 악랄한 일본군 밑에서 험한 삶을 살아야 했던 젊은 시절, 그 후유증으로 매일같이 누워서만 보내 바깥세상이 퍽이나 그리웠던 한평생, 그리고 지금은 쓸쓸히 노후를 보내는 서봉구씨(66. 외속 하개) - 눈을 감고 앉아 있노라면 귓전으로 전해지는 폭음이 생생하고, 8월만 되면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 힘없는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치를 떨어야만 하는 그는, 1941년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희생자이다.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영토확장을 위한 야심 때문에 징용당한 것이라 더욱 분하고, 기억력이 희미해질 나이임에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는 서봉구씨가 강제 징병을 당한 것을 일제의 기세가 당당했던 1943년 4월경. 18세의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르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북단에 있는 오미나도 해군 신설부에 배치돼 일본군 지원병이 된 것이다. 해군소속이었지만 서씨가 하는 일은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고 다듬고, 대포 받침을 만드는 등 전투를 뒷받침하는 공사와 보초를 서는 일이었다. "그때 했던 고생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남의 나라에서 총알받이가 된다는 것. 그보다 더 큰 서러움이 어디 있겠어요. 하루 빨리 광복이 오길 바랄 뿐이었지요." 콩깨묵, 보리개떡, 시커먼 보리로 만든 주먹밥 1개로 그나마 끼니를 때우면 다행이었던 굶주림과 언제 종전이 될지도 모르는 엄청난 죽은의 전쟁을 하루하루 치루면서도, 항상 그의 의식속에 살아있는 것은 꼭 살아서 돌아가야 된다는 끈질긴 생명력이었고, 그러한 신념으로 2년 수개월 동안 밤낮없이 산등성을 넘나드는 강 훈련과 끝도 없이 계속되는 죽음에 대한 엄습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서봉구씨는 회고한다.

그래서 1945년 8월 15일 일본땅에서 해방을 맞고 그 동안 부르지 못한 '대한독립만세'를 맘껏 소리쳐 부를 수 있었으나, 그 이후 고향으로 오기까지의 역경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배가 파산돼 물 속에서 고기에게 살이 뜯긴 일, 팔이 빠진일, 기운이 없어 엉금엉금 기던 일,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겨우 배를 얻어 타 고추 잠자리가 하늘을 수놓던 1945년 9월 말경에야 보은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고국에 돌아온 후 전쟁이 후유증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좁쌀로 쑤운 죽 3숟갈만으로 끼니를 떼워야 할 정도였지만 그 동안 국가로부터 받은 보상책은 전혀 없었다.

"날이 선선해지면 손발이 저리고 몸이 아파오기 시작해 매일매일 약을 밥먹듯이 하지마 워낙 어린 나이에 잘못된 삭신이라 잘 낫지도 않는다."고 말하면서 "얼마 전 KBS 1TV로 방송된 태평양전쟁 참전 동지회 소식을 보고 물어 물어 서울 용산 까지 찾아가 회원으로 등록했다."는 서봉구씨는 두 해전에 부인을 먼저 보내고 슬하에 자식도 없이 쓸쓸히, 아직도 감격스런 광복의 8월을 맞이한다.


(금주에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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