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치사보다는 관심과 이해를
매년 현충일 아침이면 전국적으로 울려퍼지는 싸이렌소리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이 무심히 흐르고 제각기 생활의 발걸음을 재촉하다 무감각하게 잠시 멈추어 서서 고개숙인 채 묵념을 한다. 이때 우린 얼마나 순국선열을 생각하고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기리는가? 원호의 달 6월에 현충일과 6·25를 맞아 한번쯤 생각게 되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그들이 있어 지금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있을진데, 그들보다는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죽어간 분신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절규가 우리들의 가슴에 더 짙게 새겨질 만큼 우리는 그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자식을 잃고 아버지를 잃은 유족회, 남편을 잃은 미망인회, 전쟁터에서 팔과 다리를, 그리고 정신마저 잃어버리고 불구가 된 상이군경회 문훈회, 이들국가 유공자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 '국가유공자'라는 허울좋은 명예만으로 한맺힌 인생을 보상하고 대변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 그들 모두의 외침이고 물음이다. 이들의 가슴가슴 마다에 묻어둔 상처는 다시 제2세대로까지 이어져, 아버지를 나라에 빼앗기고, 비록 생존했다할지라도 육체의 일부를 빼앗긴 아버지가 정신마저도 전쟁의 황폐함에 물들어져, 전후세대인 이들에게까지 전쟁의 상흔은 깊게 남아 있다. 정부의 국가유공자 예우대책에 따른 기본연금을 받고 대학까지의 학자금이 면제된다는 사실만으로 일반인들이 국가 유공자 자녀를 바라보는 눈은 천차만별이다.
처음엔 원호대상자로, 다음엔 보훈대상자로, 이제는 국가유공자녀로 불리우는 이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그랬다. 넉넉치 못한 가정경제 형편으로 정부의 보조금과 학자금을 지원받는 이들을 그저 생활보호대상자 정도로만 인식하는 예가 많다. 6·25 참전 전사자나 부상자들은 낮은 학력과 어려운 가정형편속에서 참전하였던 터여서, 많지 않은 정부보조금에 의존하며 근근히 생할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남편을 전쟁터에서 잃고 남은 인생을 자식에게만 기대하고 의존하며 꾸려나가는 유가족의 생활형편 또한 말이 아니었으며, 부상자들은 눈과 귀, 팔과 다리를 잃고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적 안정감을 누리지 못해 원만한 가정을 꾸려나가기 힘들었다.
이렇게 어려운 가정생활과 자신에게만 기대를 걸고 사는 어머니에 대한 부담감, 항상 불안정한 상이군인인 아버지, 이러한 가정환경속에서 성장한 국가유공자의 자녀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구가유공자임을 자랑스러워 하고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생활하는가에 대한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예전에는, 학비보조금을 학생들에게 직접 주는 등 학생 상호간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예도 있어서 국가 유공자 자녀들 스스로가 국가유공자 자녀임을 노출하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모 양은(21. 보은 죽전) "나라에 공을 세워 책정된 국가유공자인데 보통사람들이 국가유공자를 생활보호대상자 정도로만 생각가하는 것이 싫었고 그러나보니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임을 말하는 것이 싫고 부담스러웠다."고 말한다. 또한 6·25에 참전, 전사한 아버지를 가진 김점순 씨(마로면사무소)는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엄마와 남동생 셋이서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며 "먹고 살기에 급급하다 보니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임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다만 너무 생활이 어렵고 힘들때면 아버지를 앗아간 전쟁과 국가가 원망스러웠었다."고 회고한다.
이렇게 이들 스스로가 국가유공자의 자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긍지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전쟁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을 지킨 고귀한 자유의 수호신이었던 국가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이전에, 학자금과 생활비를 보조받는다는 생활보호대상자 정도로의 주변인식속에 살아가다보니 이들 국가유공자 자녀들 스스로가 노출을 꺼려하는 것이다. "더구나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아니라서 탈선의 우려가 많고, 탈선한 자식들을 걱정하는 경우가 국가유공자 가족들 사이에 종종 있어 안타깝다."고 대한 상이군경회 보은군지회 한경호 회장은 말한다.
국가유공자라고 예우해 주는 것 같지만 사실상 그 예우로 인해 입은 정신적 피해가 더 크다는 것이 대부분의 국가유공자들과 그들 자녀들의 생각이고, 국가유공자에 대한 근본적인 내용 교정을 더 확실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61년 원호처가 창설되면서 중·고 학생들에게 취학보호(학자금 지원 진학 관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하였거나 전상을 입은 사람의 자녀와 순직 군·경 자녀 및 유족들을 보훈처에 신고, 심사결정 하여, 중학교는 일반학생과 동일방법으로 추첨배정하고 고등학교는 입학고사 성적에 관계없이 정원의 3% 범위 내에서 전원 진학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성적이 너무 저조한 학생이 입학하면 기초학력 부진으로 학업에 흥미를 잃어 탈선이 우려될 뿐만아니라 자기의 능력과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인문계 고교만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 고등학교 졸업후 취업에 애로가 많거나 대입 재수생이 많이 발생, 사회문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관계기관과 단체의 협의 후에 92학년도 고등학교 진학관리시에는 국가유공자 자녀 선발고사 성적이 낮거나 일반 합격 수준이하인 사람들중에서 최하위부터 10% 해당자는 합격을 제한하고, 실업계 고등학교는 종전과 같이 지원자를 전원 입학시킬 계획으로 있으며, 학자금은 우체국을 통해 교육보호 대상자 및 보호자에게 지급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가유공자의 자녀지도를 위해 연수교육, 산업시설 견학, 전방 견학, 병영입영, 모범자녀 포상, 국가유공자 자녀의 '나의 제언' 원고 공모 등 건전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20세 이상인 경우도 대학 재학중이면 대학졸업때까지 학비를 보조해 주고 졸업 후부터 35세 이전에는 직장을 알선해 주며, 시험응시에 10% 가산 혜택과 각 기업체나 기관은 총인원의 5%∼8%를 국가 유공자 자녀로 의무고용토록 규정되어 있다.
또한 개인택시나 자영사업을 희망할 경우 7백만원까지 대부 지원하여 주고, 무주택자에게는 1천만원까지 주택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국가유공자 예우대책에 따른 기본 연금이 87년 월3만원에서 88년 5만원, 89년 8월8만원, 11월 12만원, 90년 15만원, 다시 91년 올해부터는 25만원으로 인상하여 지급하고 있는데, 이런 기본연금은 정부가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유가족에게 지급한 보상금과 많은 차이를 보여 불만이 누적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불만을 떠나서, 내일을 책임질 전후 세대인 젊은이들- 즉, 국가유공자의 자녀들이 나라에 대한 봉사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해주는 최소한이 이해가 더 필요하다고 그들은 지적한다.
군내의 유족회(회장 최임봉) 1백6명, 상이군경회(회장 천경회) 76명, 미망인회(회장 이순영) 67명, 무훈회(회장 김도식) 48명 등 3백10명의 국가유공자와 그 가족들은 자신이나 자신이 아버지의 행적에 공치사를 원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 6월 만큼이라도 국가유공자를 제대로 알고,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것이 국가유공자들에게 대한 최소한이 예우가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바램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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