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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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의 진실
  • 이장열(한국전통문화진흥원장)
  • 승인 2024.02.2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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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어느 봄날, 친구들과 어느 시골동네 호수로 낚시를 갔을 때였다. 우리가 진을 친 곳에 인접한 밭에는 한 노인이 소를 부리며 조용히 밭을 갈고 있었다. 그 위쪽에는 붙은 듯이 땅에 꼬부라진 할머니가 호미로 땅을 긁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잡풀도 보이지 않는 거의 맨땅이지만 흡사 밭을 메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좀 이상해서 밭갈이하는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니 “내 어머닌데 그냥 저러고 계신다”면서 밝게 웃었다. 사정을 알고난후 다시 할머니 곁으로 가서 톤을 좀 높여서 저기 밭을 가는 저분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호미질을 멈추지 않은채 “응, 내 아들”하면서 연방 땅을 긁는 것이었다. 기계적으로 땅을 긁는 할머니는 우리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앉아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폭의 그림 같은 효자아들과 노모의 평화로운 모습은 조요한 한폭의 풍경화였다. 맨땅을 긁는 할머니는 치메기도 보였지만 나이든 자식이 소를 모는 밭데기 옆에서 자식을 돕고 있는 모습과 자기 자식인줄 아는 것을 보면 치매도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어릴 때 “고려장”이라는 생매장의 전설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저 “전설따라 삼천리” 방송프로처럼 가볍게 지나치곤 했다. 그리고 치매에 걸린 부모가 지겨워서 “저 정도 치매라면 고려장 감이다”라는 불효자식의 말도 가끔 들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전개되는 효자와 노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식이 늙은 부모를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산속에다 내다 버리는 풍습은 있지도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늙은 부모를 산속에 갖다 버리는 그런 식의 “고려장”은 어느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고대국가 시절에 “순장”제도는 있었다.
신에게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산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고대국가인 아스떼까(Azteca)인들은 제전인 피라미드 꼭데기에서 산 사람의 심장을 바로 꺼내서 태양신께 바쳤다. 그리고 희생자의 시신은 저 밑에서 기다리는 제물로 죽은 자의 소유주(전사, 종의 주인, 희생자의 제공자)를 위해서 피라미드 돌계단 저 아래로 굴려 떨어뜨렸다. 밑에서 기다리던 이들은 그 시체를 가지고와서 삶아서 제사음식으로 나누어 먹었다. 이는 신께 인신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었지만 가야시대의 순장풍습은 부족장 무덤주위로 수십명을 생매장했다. 발버둥치는 희생자들을 현장에서 죽여서 묻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지금 이야기하는 “고려장”은 아니다. 산중에 큰 돌방을 만들고 그 안에는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 먹을 양식과 물 등 음식을 넣어놓고 무덤을 밀봉하여 그 안에서 살다가 죽으라는 것이 우리가 들어온 “고려장”이었다. 이런 방식은 고려시대는 물론 삼국시대 이전 고대국가에도 없었다. 고대무덤을 발굴해보면 생활공간 같은 커다란 널방석실을 보고 여기에 사람이 살았구나! 하고 상상해서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유목민인 몽고족들의 초원 생활을 보면 늙고 병들어서 이동이 불가한 자기 부모를 초원에 버리고 떠나가는 풍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가축과 함께 새로운 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떠돌이 생활이기 때문에 이동이 불가능한 늙은 부모를 입고 먹을 것을 어느정도 남기고 온 가족이 울면서 떠나간다. 그리고 몇 달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보고 그때까지 부모가 살아있으면 가족과 다시 합류하는 것이다. 이런 몽고족의 풍습이 원의 부마국이 되었던 고려시대(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6대왕)에 몽고풍습이 몸에 베어 그 이전시대의 석실총과 합쳐져 노망든 부모를 버리는 장소로 “고려장”이라는 말로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단언컨대 고려시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이라는 것은 없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효자아들과 치매 걸린 노모의 아름다운 모습의 그 어디에서 그런 끔찍한 생매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동방예의지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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