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외침을 듣다
“물은 흘러 인간의 삶속에 들어와 동학농민군의 외침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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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외침을 듣다
“물은 흘러 인간의 삶속에 들어와 동학농민군의 외침을 만나다”
  • 박진수 기자
  • 승인 2024.01.25 0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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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속리산 천왕봉 금강을 만들다

글 싣는 순서
1. 하늘아래 첫동네 신선을 만들다. 
2. 물은 흘러 속리구곡이라 부른다.
3.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외침을 듣다. 
4. 고봉 김정선생, 이상 정치를 키우다
5. 깃대의 기상과 오천 군사 목을 축이다.
6. 절세의 기재 최수성의 마을 원정리.
7. 흘러간 물은 다시 청산에 잠기다.
8. 비단의 금강, 백제 문화를 만들다.

 작은 개울이든 큰 강줄기는 그 시작이 있으며 산을 넘지 못하고 아래로 흐른다. 속리산 천왕봉은 옛 고서 &#11810;신동국여지승람&#11813;에 따르면 ‘속리(俗離) 삼파수(三波水)라 불리고 있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은 아래로 흘러 한강, 낙동강, 그리고 금강으로 흘러 세갈래로 흐른다고 전하고 있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작은 하천이 모여 우리의 삶의 터전을 만들고 다시 아래로 흐른다. 
보은은 지정학적으로 백두대간중 한남금북정맥을 배산을 형성하고 있어 비단처럼 펼쳐진 금강의 발원지 마을을 따라 삶의 터전속에 묻어 있는 문화와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편집자주>

 

장안면에서 바라본 구병산과 장안마을.
장안면 황곡리에서 바라본 구병산과 장안마을.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속리구곡을 만들고 다시 흐른다. 이제 넓은 들판을 만나 인간의 삶속에 깊숙이 파고든다. 속리구곡을 벗어난 물은 예전 외속리라 불리던 장안면에서 삼가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속리산 천왕봉이 처음 만나 도(道)를 찾아가는 신선과 인간사이를 지나 이제 인간의 삶속에 깊숙이 들어와 이제부터는 인간의 삶속에 새로운 생명을 생산하는 없어서는 안될 물이 된 것이다.
1890년대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되면서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주무대였다. 이중 충청도 보은이 차지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자취는 시작과 끝을 말해 주고 있어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바로 삼가천이 시작되는 지금의 장안면 장안리는 1893년 3월 동학교도의 최고 규모의 집회의 현장이다. 장안면의 소재지인 장안마을은 배산인 보습산 골짜기의 줄기가 수풀림(林)자 모양새로 굽이쳐 흘러 마을을 끌어안고 있는 형세인 장안리는 19세기말 국운이 기울던 때 분연히 일어선 수만명 동학농민군이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창의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곳이다. 
장안면 보습산의 최고봉은 ‘옥녀봉’ 이라고도 불린다. 이름만 들어도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기도 하지만 속리산 준령이 백두대간 한남금북정맥의 지선이라는 점에서 이곳 보습산은 남쪽으로 뻗어있는 지형이라는 점에서 “기가 센 의미”인 옥녀봉으로 불려지고 있다. 옥녀봉과 함께 장안리 앞 마을 황곡리에는 옥녀의 검은 치마바위가 유래하고 있어 이 역시 장안리 마을의 풍수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선사가 산간벽지로 쫓겨 다니면서 포교 활동을 할 때부터 동학의 중심지였으며 1892년 대도소가 장안리에 설치되면서 동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래 장안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조선조때 말을 놓아 기르던 마장이 있었는데 이 마장 안쪽에 마을이 있었으므로 『장안』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말에 장안을 한자로 잘못 표기하여 장내라고 문서상 기록되었으나 실생활에는 조선조 이래 줄곧 장안으로 불렸다고 한다. 
서기 1893년 동학교도 3만여명이 이 마을 앞 천변에 모여 교조신원과 척왜양창의를 내걸고 시위를 하여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의 단초가 되었으며 2차 봉기때는 동학농민군이 마을에서 출전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곳이다. 
그해 3월 동학 보은집회 때에는 하도 많은 인파가 모여 「서울 장안이 장안인가, 보은 장안이 장안이지」라는 동요가 생길정도로 많은 동학교도가 모였다고 한다. 
당시 보은 보은집회에 대해 관변측이 대처한 과정과 내용은 『취어』에 상세히 기록되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보은집회는 지방관아에서 볼 때 전무후무할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즉각 보은군수는 왕조정부에 보고하여 그 실상을 알리고 향리의 우두머리를 시켜서 동학 지도자를 만나보게 하고 또 자신도 달려가 자세한 사정을 조사 하였다고 한다. 
장안마을에는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이 집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대단히 큰 기와집에 동학 도소가 설치되고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돌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천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마을에 흩어져서 잤다고 한다. 
당시 대도소가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 터만 남아 마을 뒤쪽의 논으로 변해 있으며 “산아래 평지에 돌성을 쌓았는데 길이는 일백여 걸음이고 넓이도 일백여 걸음이며 높이는 반장정도로, 사방에 출입문을 내었다” 라는 기록은 돌성의 당시 규모를 말해주고 있다. 
지금의 삼가(비룡)저수지가 있기 전에는 장안마을에는 온통 밭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추나무가 들어찬 밭이었는데 이 밭 사이에 돌성을 쌓고 집결해 있었다고 한다. 20여일간 집결해 있던 동학교도들은 장안마을의 집회가 해산되었고 교주 및 고위 간부들은 청산 갯밭과 보은 장안을 오가며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락하며 활동을 해 나갔던 것이다. 
엄청난 동학교도의 집결에 조선조 정부는 해산명령을 내렸고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주장을 군대로 막으려 한 역사의 현장이다. 
장안리는 보은군 장안면의 중심마을 면소재지로써 넓은 들과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마을의 모습은 대대손손 이어질 명당임을 확인할 수 있는 마을이다. 장안마을을 흐르는 삼가천은 이제 본격적으로 넓은 들판을 만나고 인간의 삶속에 깊숙이 들어와 흘러간다.

장안마을 삼가천.
장안마을 삼가천.
장안마을 뒷산 보습산.
장안마을 뒷산 보습산.
개안리 소나무숲.
개안리 소나무숲.
지금은 없어진 동학취회지 안내판.
지금은 없어진 동학취회지 안내판.
개안리에 위치한 우당고택.
개안리에 위치한 우당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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