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청천 푸른물결 구병산의 절경을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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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청천 푸른물결 구병산의 절경을 한눈에
  • 보은신문
  • 승인 1991.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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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정사(孤峯精舍)
보청천을 휘감는 물소리와 구병산의 절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곳 마로면 관기리에 위치한 고봉정사에서는 옛 선인들의 낭랑한 강학(講學)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하일락 꽃 향기 가득한 뜨락엔 나비들이 꿈을 펼치듯 날아다니고, 담너머의 고목엔 많은 새들이 날아와 옛 선인들의 글 읽는 소리를 대신하듯 노래하고 있다.

고봉정사는 조선 중종때의 학자이며 영의정에 추증(追贈·공이 많은 관리가 죽은 뒤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된 문정공 원정 최수성(猿亭 崔壽城, 1487∼1521) 선생이 형조판서를 지내 충암 김장(沖庵 金淨)과 병암 구수복(屛庵 具壽輻)과 함께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전 낙향하여 정자를 세우고 많은 후학을 배출했던 곳이다.

특히 고봉정사는 군내 능성구씨(陵城具氏)가 세거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사연이 깃들어 있는 곳 지난 1980년 1월 14일 지방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고, 1981년 개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초정(初丁)에 강릉최씨, 경주김씨, 능성구씨 문중과 유림들이 제향을 올린다. 고봉정사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로 쓰여졌고 명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의 현판은 전 최규하 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진 것이다. 고봉정사에는 설립당시 강학을 하던 세분의 며현을 배향(排享)해오고 있다.

원정 최수성은 강릉 최씨로 성종 18년 1487년에 태어나 거유(巨儒) 김광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에 정암 조광조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원정 최수성 선생이 마로면 원정리에 서당을 짓고 머물렀기에 마을 이름도 선생의 호를 딴 원정리로 부르고 있다. 최수성 선생은 지조높은 도학자로서 벼슬에는 큰 뜻이 없어 전국의 이름난 산천을 찾아다니며 시를 짓고 매사에 구속됨 없이 풍류를 즐기는 선비였다고 한다.

이 당시 충암 김정 선생이 보은읍 학림리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어, 같이 학문을 논하면서 친교를 두터이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공신들과 짜고 기묘사화(己卯史禍)를 일으켜 글 잘하는 선비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권세를 잡아 정승에까지 오른 남곤(南袞)이 유배생활을 하는 충암 김정 선생에게 산수도 그림 한폭을 보내면서 그림의 뜻을 나타내는 시 한수를 요청했다고 한다. 때마침 원정 최수성 선생이 방문하게 되어 충암 김정 선생과 같이 시를 짓게 되었다.

저무는 해는 서산에 내리고 이로운 연기는 먼 수풀에 피어 오르네 복건 쓴 서너 사람 망천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시에서 남곤을 저무는 서산낙일에 비유해 꼬집음으로 인해 기묘사화 이후 좌의정에 오른 남곤이 원정 최수성 선생은 죄인으로 몰아 죽음을 내려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후일에 원정 최수성 선생의 명예가 회복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충암 김정 선생에 대해선 상현서원 탐방기사(본보 33호 90년 9월 8일)에 자세히 소개되었으므로 마로면 관기리 일대 능성구씨의 터전을 일구게 된 병암 구수복(1491∼1545) 선생에 대해 산펴본다. 병암 구수복 선생은 성종 22년(1491) 서울에서 진사인 구이(具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증종 9년(1514) 24세에 지금으로 말하면 국비장학생으로 뽑히며 성균관에서 사가독서(賜家讀書)으로 직소(直小·숙직을 하는 곳)에 있을시 기묘사화의 음모를 꾀한 심정(沈貞)등으로부터 대권 북문을 열라는 협박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이일로 관직을 빼앗기고 장인되는 이가 딱하게 여겨 보은에 있는 농장에서 살게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종들의 모략으로 장인에게 쫓겨나게 되었고, 겨울철 길거리를 배회하던중 김태암 찰방(察訪·지방에서 역을 지키던 외직)을 만나게 되었고 수십결의 논과 밭을 얻게되고 고봉정사를 학당로 삼아 후학들의 학문지도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중종 28년(1533) 구수복 선생이 43세 되던 해에 억울한 파직동기가 밝혀지면서 전라도 구례 현감(縣監)으로 복직되어 그곳에서 55세 일기로 타계 했다.

비록 병암 구수복 선생은 보은을 떠나 구례에서 타계했지만 기묘사화 이후 13년간 보은에 머물면서 후진의 학문을 지도하여 후학들을 많이 배출, 당대의 석학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마로지역 능성구씨 가문이 세거하는 근원을 이룩한 분이라 하겠다. 또한 고봉정사내에는 난세에 대비, 종족의 내력을 새긴 석조유적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고봉정사 옆 건물은 고봉 정사를 관리하는 여씨의 일가가 살고 있다. 공봉정사를 한바퀴 둘러보면서 가슴에 와닿는 것은 당대 석학들의 삶이 소인배들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어도 지조를 벗삼아 순리를 존중하며 듯을 굽히지 않는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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