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리사(月裡寺)를 가까이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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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사(月裡寺)를 가까이 두고
  • 양승윤(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4.01.0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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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 바닷길에 크고 작은 무역왕국이 들어서기 시작한 14세기 이전에도 바닷길은 거기에 있었다. 바닷길은 계절풍에 따라 정확하게 열리고 닫쳤는데, 동남아에서는 12월 초부터 3월 말까지 한반도와 동북아로부터 몰려오는 동남풍과 인도 대륙 동부를 훑어오는 서남풍이 약 4개월 동안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를 가르는 말라카해협과 쟈바 북부해안에서 만나게 된다. 동남아 고대사의 백미로 꼽히는 <믈라유사>에는 15세기 전성기에 전 세계 80여 지역에서 무역상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고 쓰고 있다. 남송(南宋)을 거쳐 고려 상인들도 이곳으로 인삼을 가져왔을 것이고, 오늘날까지 ‘꼬리솜(고려삼)’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곳을 경유하던 200년 바닷길 실크로드는 고비사막을 낙타로 헤집고 다니던 1200년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화려했다.  
   동남아의 이웃 인도에는 수많은 신(神)의 세상이 있었고, 그 아래 인간들이 모여 살면서 힌두문명을 꽃피웠는데, 힌두교가 그 중심에 있었다. 아직 왕국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거나 보다 큰 왕국을 지향하던 동남아의 왕국들은 바닷길을 따라 전파된 힌두교의 핵심인 카스트제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승려, 무사(武士), 농상민, 노예 등 사성(四姓)제 계급사회가 왕국의 근간을 세우는데 유용할 것으로 여겨져서다. 머지않아 수마트라 중남부의 빨렘방 (2018년 아시안게임 개최지)에서 불교 문화를 앞세운 스리비자야 왕국이 발흥하였다. 신라 혜초 스님(704-787)도 다섯 천축국(인도)을 찾아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중국 문헌에 삼불제(三佛齊)로 등장하는 이 왕국은 영토를 확장하여 통치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역을 통한 상호이익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바닷길 군소왕국들의 환영을 받았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650년부터 1377년까지 700년 넘게 존속하며 동남아 바닷길 실크로드를 관장하며 유럽에 향신료(香辛料)를 실어날랐다. 힌두왕국의 터전 위에 세워진 이 불교왕국이 오래 지속된 까닭은 계급사회를 지향하는 힌두 왕국보다 ‘만인평등’의 불교사상이 여러모로 유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와 쟈바의 모든 항로를 확고하게 장악했으나, 내륙의 쌀 생산지를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식량을 쟈바의 힌두왕국 산자야로부터 공급받았다. 오래지 않아서 수마트라와 쟈바 간의 해상 무역 주도권을 놓고 두 왕국은 경쟁 관계에 돌입하였으므로 식량 공급에 큰 차질이 발생하였다. 식량 부족은 급격하게 왕국의 쇠락을 가져왔다. 마쟈빠힛 왕국(1293-1527)이 뒤를 이었는데, 쟈바 전역를 장악하고 무역뿐만 아니라 농업을 육성한 해양부 동남아의 대표적인 ‘힌두불교’ 왕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동남아 해양부의 중심이자 인구 밀집 지역인 쟈바는 이처럼 일찍이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하였다. 힌두교와 불교는 같은 뿌리의 종교로서 많은 부분에서 맥락을 같이한다. ‘업’사상, 고대철학의 근간인 법과 제도, 해탈(解脫), 윤회사상 같은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불교가 힌두교의 한 부류(종파)라고 말한다. 다른 점도 많다. 무엇보다도 힌두교는 시바(파괴의 신), 비슈누(번영의 신), 브라만(창조의 신) 등 세 신을 정점으로 한 다신교라는 점이다. 또한 소(牛)를 숭배하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그러나 불교는 모든 잡신을 거부하고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열반(涅槃)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힌두교와 힌두문자는 동양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가(naga)’ 사상을 예로 보자. 뱀 숭배 사상이다. 힌두사원마다 돋보이는 거대한 머리의 뱀은 왕국과 최고 지도자의 위엄과 존엄을 상징한다. 부처님 주변에도 여러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 또한 같은 의미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집지킴이 가신(家神) 신앙의 주체도 뱀이었다. 우리나라의 ‘나라’도 산스크리트라 칭하는 힌두문자에서 나왔다. 신라시대 향가(鄕歌) 표기에 사용되었던 향찰(鄕札)도 이 문자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꽤 많다. 우리 동네에서 면사무소를 향하다 보면, 남대문교를 건너기 직전에 월리사(月裡寺)로 가는 길을 알리는 입간판이 서 있다. ‘달이 저토록 밝은 이치를 깨닫게 하는’ 사찰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멀고 먼 태고적 불교 문화의 작은 뿌리 하나가 동쪽 땅끝인 예까지 뻗친 것이리라. 고향에 살면서 가까이에 정갈한 고찰(古刹)이 있다는 게 참으로 위안이 되고 한겨울의 솜이불처럼 따뜻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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