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청백리상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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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청백리상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 보은신문
  • 승인 1991.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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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재(보은군 번영회장)
국호의원 뇌물 외유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질세라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예·체능계 입시부정과 교수채용 비리사건이 터지고,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온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털어서 먼지 안날 사람없다'라는 세간의 속담을 실감나게 했다.

불현 듯 옛날 우리 한반도의 청백리상이 간절하게 연상되면서 과연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하고 자문하게 된다.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옛부터 전해오는 평범한 진리이다.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 청백리를 많이 배출하는데도 기록을 세운 성군(聖君)이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자 경회루 동쪽에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했다.

부왕 태종이 "부덕한 내가 왕좌에 있으니 하늘이 노해 가뭄이 계속되는 것이다" 라고 결연히 왕위를 양위한 행적을 떠올린 것일까? 어느날 바라던 비가 흡족히 내리자 움막 앞은 진수렁이 되었고 누군가가 짚을 깔아 왕의 나들이를 편하게 했다. 그러자 세종은 역정을 내면서 "짚일망정 요긴하게 쓰일 곳이 있을 텐데 누가 시키지 않은 짓을 했는가" 라고 꾸짖었다. 또한 소갈증(消渴症)으로 고생하던 세조에게 어의가 양고기를 장복하며 효험이 있다고 주청하자 "내 어찌 스스로의 목숨을 위해 짐승을 해칠 것이며 우리 나라에 없는 사치스러운 외국의 짐승을 들여오게 한단 말인가" 고 거절하였다.

몸보신에 좋다하면 무엇이고 사양않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지않을 수 없다. 이렇게 왕이 몸소 사치를 배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자 신하와 백성도 이를 따랐다. 영의정 황희의 검소한 생활은 너무도 유명하다. 어느날 조회에 영의정이 보이지 않아 왕이 그 곡절을 승지에게 묻자 "어제 관복을 빨았는데 비가 와서 관복이 마르지 않아 못나왔다" 고 전했고 왕이 황희정승을 찾았을 때 그가 거처하는 방안에는 멍석이 깔려있었다.

왕은 "가려운 등허리 긁기는 쉽상이겠구먼"하고 찬탄하며 관복을 마련해주도록 하명했다" 는 것이다. 좌의정 맹사성은 소를 타고 출퇴근하여 소 탄 정승으로 유명하고, 우의정 유관은 아들 4형제가 높은 간직에 오른 복 많은 재상이면서도 그의 사저는 세까래가 나팔을 불만큼 초라했다. 어느 해 장마철이 되어 유관은 방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의 부인이 집안살림에 무관심한 남편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던 터라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자 유관은 "이 장마에 우산이 없는 백성들은 어떻게 살꼬" 하였다는 것이다. 새삼스레 이들 청백리들이 그리워짐을 느끼며 앞으로 지역 지역발전과 나라발전을 이끌 현대의 청백리들이 등장하길 기원해 본다.


<생각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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