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향토문화를 찾아서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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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향토문화를 찾아서⑶
  • 보은신문
  • 승인 1991.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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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대왕이 찾은 속리산
아름다운 한반도 중앙에 자리하고 우리나라 팔경 중 네 번째인 속리산은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나 깨끗하고 아늑한 곳이다. 태백산맥으로부터 서쪽으로 수다산, 백병산, 마아산, 견전산을 이루고 소백산이 되어 죽령을 지나 삭성산, 계림산이 되고 조령 새재를 지나 이양산이 되고 다시 남쪽으로 불일산 화산을 이루었고 다시 속리산이 솟았다. 원주봉은 해발 1057미터이며 천왕봉이 자리하고 충북 보은군, 괴산군, 경북 상주군의 삼군에 걸쳐 예로부터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소(小)금강이라 불리며 팔대 팔문 팔암 팔봉으로 아름답게 묘사된다.

산 품안 중앙에 자리잡은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년)에 의신조사가 창건, 현재에 이른다. 속리산에는 이조 7대 세조대왕(수양대군)의 많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27년전 서기 1464년 2월에 세조대왕이 속리산 복천암에 와서 3일간 기도 수양 하였다는 것이다. 세조대왕이 피부병에 걸려 날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자 우리나라 명산을 찾아 신벼을 고치려 하였다. 처음 강원도 금강산을 먼저 찾아 명산 약수를 마시며 이름난 약초를 써봐도 차도가 없고 신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대왕은 모든 정사를 미루고 속리산에서 기도 수양할 것을 결심, 속리산을 향해 행차하였다. 행차도중 세조는 지금의 강원도 단발령에 이르러 속세를 떠나는 마음으로 상투를 자르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다. 단발령도 그때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까지 불리우고 있다. 이후 보은땅에 당도하여 얼마간 머무르니, 말티고개 밑에 자리한 한옥마을, 일컬어 대궐터라 불리우는 곳에 행정부가 대왕행차에 동행하여 머무르며 정사를 다스렸다, 임금이 속리산에서 요양하는 기간 중 임시 행정부가 자리했던 곳이 바로 대궐터인 것이다. 해발 800미터의 말티고개는 열두 구비 구비마다 역사를 안고 있다.

말티고개란 명칭도 세조대왕이 말년에 넘은 고개라 하여 끝말(末) 고개티하여 '말티' 라 부른 것이 현재에 이른다. 신라 진흥왕 당시부터 지금까지 약 1400년간 이 재를 통해 법주사를 오고갔다. 지금은 1973년에 2차선으로 확포장 하여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다시 얘기로 돌아가면, 세조대왕이 연(가마)에 올라 속리골로 향하니, 속리골에 살고있는 모든 백성들은 상판리에서 지금 정이품송까지 줄을 지어 대왕의 행차를 마중했다고 한다. 이때 어린소녀가 대왕의 눈에 띄어 대왕은 연을 내리라 하명하고 그 소녀를 수차 바라 보더니 신하는 시켜 그 부모와 살고있는 곳을 알아보라 일렀다.

그 어린 소녀가 대왕의 딸인 혜원공주와 얼굴모습이 꼭 닮아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이 소녀의 집은 정이품송 바로 남쪽 200미터 지점인 가마골 이었다. 신하들은 아이를 따라 가마골에 이르러 부모를 확인하여 대왕에게 아뢰었다. 아버지는 1453년 계유정란때 대역모반죄로 처형당한 김종서의 손자 청동이며 어머니는 대왕 후궁의 딸 혜원공주임을 알게 되었다. 조카 단종을 영월로 보내어 죽이고 왕위를 뺏은 것을 혜원공주가 탓하자 대왕이 '너는 내딸이 아니다' 라며 사약을 내렸었다.

이때 후궁은 딸 혜원공주를 유모에게 딸려 피신케 하였고 유모와 혜원공주는 이곳 저곳을 다니다 바로 이곳 가마골에 이르렀다. 날이 저물어 이곳에 살고있는 더벅머리 총각에게 며칠 머물 것을 부탁하자 총각은 어느댁 규수인가를 물었다. 혜원공주가 궁중패물을 보이자 총각은 궁중패물을 한눈에 알아보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유모는 총각의 놀라는 기색을 알아보고, 필시 고귀한 신분의 사람임을 간파하여 총각과 혜원공주의 혼인을 종용했다.

이총각이 바로 김종서의 손자 천동 이었다. 이조당시 역족은 3족을 멸하게 되어있었다. 천동은 이곳 가마골에 피신와서 신분을 숨긴 채 숯은 구어 먹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숯가마가 있었다 하여 지금도 가마골이라 불리운다. 대왕은 역적의 손자와 혜원공주가 같이 살며 아기까지 있는 것이 못마땅하나 가장 아끼는 딸이며 그 사위인지라 차마 벌하지 못하고, 복천암에서 삼일기도 수양한 뒤 환성길에 다시 이곳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복천암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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