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인상의 표본 의열문(義烈門)’ 소고(小考)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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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인상의 표본 의열문(義烈門)’ 소고(小考) 2편 
  • 김병서 
  • 승인 2023.11.3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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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증 정부인 고령신씨 소사(小史)
의열문 주인공 증정부인 고령신씨(贈貞夫人高靈申氏 1572~1597년)는 고령부원군 신숙주의 5대손인 졸제 신식(拙濟 申湜 1551~1623)의 큰딸로 청주 산동(현재 낭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신식과 함께 대곡 성운 선생에게 배운 일구당(一丘堂) 김가기(金可幾, 1537~1597)의 아들 간서재(澗西齋) 김덕민(金德民 1570~1651년)에게 15세에 시집가 보은 종곡에서 살다 1597년 겨울 정유재란 때 왜놈에게 항거하다 거룩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때 나이 25세였다. 두 딸을 두었는데 큰 딸은 6세 때 부인과 함께 왜놈에게 화를 당해 죽었고, 작은 딸의 아들이 남인의 거두 백호 윤휴(尹휴 1617~1680년)로 신씨부인은 백호의 외조모가 된다.

집안과 지역에 전해 오는 신씨부인의 행장은 “정유재란 때 왜적이 마을을 침범하자 산속으로 피난 가던 중 왜적을 만났는데, 겁탈을 하려고 달려드는 왜놈의 더러운 손이 귀중한 유방을 만지자, 부인은 왜놈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왜놈을 죽이고 자신도 자기의 두 유방을 도려내고 깨끗한 부분만으로 죽어갔다”가 주된 내용이다. 왜적에 대한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으로 확인한 문헌기록들 보다 매우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왜적에 대한 극단적인 분노와 적개심이 있는 상태에서 구전에만 의존한 결과 신씨 부인의 행장이 전설 형태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3.문헌사료로 본 의열문
(1)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98권, 선조 31년 3월 1일 병술 7번째 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도승지 신식의 딸 신씨의 절개를 기려 정문, 복호케 하다.
충청도 보은현(報恩縣) 성족리(聲足里)에 사는 유학(幼學) 김덕민(金德民)의 처 신씨(申氏)는 정유 왜란(丁酋倭亂) 때에 남편과 시부모를 따라 산속으로 피난하였다가 뜻하지 않게 왜적을 만나게 되어 시부모가 모두 살해당하였다. 신씨는 남편의 첩과 함께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왜적이 그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함께 끈으로 묶어 끌고 가려고 하였다. 신씨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첩에게 말하기를‘나의 뜻은 본디 정해졌다.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너는 꼭 죽을 필요가 없으니 우선은 그대로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도모하라’하고, 이에 칼을 빼어 들고 소리를 높여 왜적을 꾸짖기를 ‘내가 어찌 감히 너를 따라가 살겠는가. 속히 나를 죽여라’하며 오른손으로는 칼을 잡고 왼손으로는 나무를 휘어잡고는 소리를 더욱 매섭게 질렀다. 그러자 왜적이 노하여 그의 오른쪽 어깨를 치자 땅에 쓰러져 절명하였다. 그의 비(婢) 연지(燕之)가 주인 아기를 업고서 곁에 숨어 있다가 주인이 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나와 끌어 안자 적이 아울러 살해하였다. 그 첩이 끝내 적중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와 그 전말을 이야기하였는데 그 절개에 탄복하여 흐느낌을 멈추지 못하였다. 이 절의(節義)의 상황을 조정에 전문(轉聞)하자 정문(旌門)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신씨는 바로 도승지 신식(申湜)의 딸이다.】

(2)동국신속삼강행실도
1617년(광해군 9년)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한 책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해 민심을 격려코자 반포한 문헌으로 한글본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 국어연구에 매우 귀중한 책이라고 한다.
1615년에 그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간행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각 도의 경제력에 비례하여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공홍도(公洪道 :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씩 분담하여  간행되었다.(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있는 관련 기사를 확인하게 된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조상의 음덕이 함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억되지 않는 어느 날 엄친 서재에 있는 노대환 교수(동국대 사학과)가 지은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윤휴 편을 통해 아래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백호의 모친은 경주김씨 였는데, 경주김씨의 어머니 신씨는 임진왜란 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여 그 사실이 삼강행실도에 기록된 인물이었다.”(노대환의 책 228쪽)
글을 접한 후 백방으로 삼강행실도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인맥을 통해 저자에게 직접 사료 확인을 부탁을 해 봤지만 응답이 없어 안타까움이 쌓이고 있었으나 우연히 삼강행실도가 시리즈 성격을 가진 문헌인 것을 알게 되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사이트를 통해 관련 기사를 직접 찾아 확인할 수 있었다.

엄친께서도 오랫동안 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다는 관련 내용을 찾기 위해 노력하셨을 것이다. 그 공덕들이 쌓여 필자가 확인하게 된 것이라 생각하니 나름의 보람과 자부심이 밀려왔다.
정유재란을 임진왜란으로 표기한 것과 사료의 출처를 적확한 문헌명으로 기재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지만 문헌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 노대환 교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신씨사적 - 신씨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다
신씨는 서울 사람이니 부제학 신식(申湜)의 딸이요, 유학 김덕민(金德民)의 아내다. 효행이 있더니 정유왜란에 도적을 산골 가운데로 피하여 늘 큰 칼을 차셔 반드시 죽을 마음을 두었더니, 도적이 문득 이르러 신씨의 얼굴을 즐거이 여겨 협박하여 몰아가려고 하거늘, 신씨 소리를 높이 하여 도적을 꾸짖고 오른손으로 찬칼을 매우 휘두르고 왼손으로 나무를 붙잡고 가지 아니했는데, 도적이 노하여 그 오른팔을 치니 즉시 땅에 엎어져 죽으니, 나이 스물다섯이더라. 그 종 연지가 주인의 집 아기를 업고 그 곁에 숨었더니, 그 주인 피해를 입는 모습을 보고 나가 안아 붙잡았는데 함께  죽였다. 소경대왕(昭敬大王) 때에 정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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