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포로였던 장갑선옹을 만나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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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한인포로였던 장갑선옹을 만나보고
  • 보은신문
  • 승인 1991.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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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정신대 실존을 증언
하와이 한인포로 2천7백여명의 명부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경북 문경의 엄선동씨가 공개, 이 명부속에 기록된 정신대로 추정되는 70여명의 명단이 밝혀져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 군의 장갑선옹(73. 탄부 장암1구)도 지난 4일 자신이 보관해오던 자유한인보와 포로명단을 공개하고, 이를 증언했다.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제작한 4 6 배판 크기, 56페이지에 달하는 프린트 필본(筆本)의 이명단에는 김정숙, 김복순 등 70여명의 여자이름이 기록돼 있다.

일제의 강제연행당시 여군징병은 없었기 때문에 이들 70여명의 명단은 정신대로 추정된다는게 관련학계의 말인데, 1945년 5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른쪽 가슴에 파편을 맞고 2년간 미군의 포로가 되었던 장갑선옹(73)이 당시 들었던 상황을 증언, 이를 명확하게 뒷받침해주는 한편 포로명단외에도 2년간의 수용소생활이 끝난후 귀국길에 가져왔던 수용소에서 발행한 「자유한인보」를 공개했다.

「자유한인보」는 포로대표인 하월용해 대좌(신원 미확인)를 비롯, 이종실(李鍾實), 박순동(朴順東), 박순무(朴淳武) 등이 주축으로 발간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 원수등의 화보가 게재돼 있고 자유에의 갈망, 조국애 등을 담을 글과 문예란까지 꾸며져 있어 이채를 띄고 있다.

징병은 언제 당했는지요? : 장암1구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적은 농사거리로는 먹고 살기가 급급해 18세부터 경북 영주로 가서 포목상, 곡물상을 하며 지냈었지. 24살에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인 25살(호적상으로는 당시 23세로 되어있었음)에 징병에 끌려갔는데, 그때가 1945년 봄이니까 2차대전이 끝날 무렵이 되겠군.

징병생활은 어땠습니까? : 징병당한 사람들이 처음엔 대구에 모였다가 일본 오시마로 건너가 4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오키나와로 가기 위해 배를 탔었지. 하지만 도중에 배가 파손되어 구사일생으로 겨울 살아나 전투에 참가하기도 전에 기진맥진해 있었어. 그러다가 오키나와에 도착해서는 언제나 먹는 것이 부족해 허기져 있었고 또 공습을 피하기 위해 땅굴을 파고 생활했는데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병이 날 지경이었어. 생각만 해도 진저리쳐지는 생활이었지.

한국인 정신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들었습니까? : 전쟁중에 근처에 70여명의 한국 유곽여자들이 와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들의 얘기로는 유곽여자들이 천막을 쳐놓고 그곳에서 생활하는데, 몰골이 형편이 없었다고 얘기하더군.

어떻게 포로가 되었습니까? : 밤중에 미군의 함포사격이 있을 때였어. 정신없이 이리뛰고 저리 뛰다가 순간 포탄의 파편을 맞고 한 사흘간 기절해 있었던 것 같은데, 깨어보니 미군포로가 되어 오키나와의 임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지.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 오키나와 임시 수용소에서 보름간 있다가 5백여명의 포로가 하와이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오키나와에서는 일본인 포로와 함께 수용되어 한국인 포로들이 징용에 대한 앙갚음으로 일본인 포로를 자꾸 때려 미군이 떼어 놓기도 했었지. 그리고 하와이 제2포로수용소에서는 2년정도 생활했었는데 미군이 비교적 포로대우를 잘해줘 먹고 입는데는 불편함이 없었어.

그당시 '자유한인보'가 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 그당시는 병원에 있어서 잘 몰랐고 하월용해 다좌(미확인 인물)라는 포로 대표를 주축으로 이종실, 박순동 등 글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자유한인보'를 일주일에 한번씩 펴내고 이름, 본적지, 출신도별로 포로명단도 만들었어(여기 에는 2천7백명의 명부외에 정신대원으로 보이는 70여명의 여자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2년동안의 포로생활 끝에 석방되었는데 귀국후 서로 잊지 말자고 포로명단을 한권씩 나눠 가졌지.

공개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 가끔식 함께 수용소 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뒤져보긴 했지만 별의미없이 보관하고만 있었어. 그러다가 중국에 지원병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이웃에 사는 친구 홍종석(장암 2구)의 아들이 국회에서 근무를 하고있는데, 언젠가 국회의원들이 오키나와 전투 참가 영령에 대한 제례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 오키나와를 방문했는데, 그 기회에 홍씨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더군. 그곳에 기자들도 함께 동행했었는데 이때 우연찮게 얘기가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기자들이 찾아 왔더군.

귀국후 포로들에 대한 소식은 들었습니까? : 내가 영주에 있을 때 징용을 끌려 갔지 때문에 돌아와서는 영주군내에서 태평양전쟁에 참여했던 50여명 정도가 계모임을 조직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서로 먹고 살길을 찾아 흩어져 살다보니 지속되지는 못했고……. 또 보은사람으로 최순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몇차례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를 못했어.

일본에 대한 생각은? : 징용이나 정신대로 끌려갔던 사람도 고생이 많았지만 본토에서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더군. 모두 공출로 빼앗기고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이 안풀려. 우선 나라에 힘이 있어야 해. 다시 그런 수모를 안당하려면……. 희미한 옛 기억을 되살리는 장갑선옹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사이로 섬광이 번뜩인다.

징요때 겪은 수많은 고초와 날씨가 흐리면 결려오는 가슴의 상처를 뒤로 접어둘만큼 기나긴 세월이 흘렸다지만, 하와이 포로수용소 명단이 공개되었다는 기사가 일간지마다 게재돼 전국에 배포되자, 소식이 없는 부친의, 또는 인척의 명단을 찾아봐 달라는 편지가 속속 날아드는 것을 보면 일본에 대한 우리의 아픔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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