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게 없는 세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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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게 없는 세상이지만
  • 김종례(문학인)
  • 승인 2023.10.19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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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님의 금초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 계좌번호를 날리던 구월도 가고, 집집마다 전화 1통화로 몇 시간 만에 벼 타작을 해결해 버리는 시월이다. 오래된 느티나무도 홍건이 취해가며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고, 그 느티 아래 인고의 세월 다 잊은 노인의 목소리로 불어오는 떨기바람~ 그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노라니, 지나간 세월 속에 고향의 가을 들녁 풍경이 언뜻선뜻 떠오른다. 저물어가는 가을황혼 아래서 황금들판을 걷고 있노라니, 느리고 평화스럽던 아날로그의 풍광들이 그리움의 파도로 밀려온다. 가을 내내 동네가 떠나갈 듯 윙윙대던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 동무들과 높다란 낟가리를 삥삥 돌며 놀던 숨바꼭질, 구수한 장떡 부치는 내음 진동하던 골목으로 모여들던 사람들, 잔칫날처럼 사람 냄새 가득했던 품앗이 타작풍광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원숙한 기도로 익어가는 들판마다 만종소리도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비록 물질적인 빈곤함으로 살아가기는 꽤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한가위 보름달처럼 순박하고 부유한 시절이 분명 있었다. 
  또한 마을에 어른이 돌아가시면 온 동네가 모여서 함께 울기도 하였다. 이별의 슬픔을 삭이느라 밤을 지새우며 하나가 되어 울고 또 울었다. 다른 집 대소사를 내 일처럼 여기며 함께 울고 웃던 정감어린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떠한가. 한꺼번에 몇 백명 몇 천명이 몰사하거나 죽어가는 광경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한탄과 한숨과 놀라움의 이변이 습관이 되어버렸는지~ 저 멀리 무감각의 세계로 내팽개쳐진 영혼이 아닌가.  
  돈만 있으면 못 할게 없는 풍요로운 세상에 별별 장사들이 다 출현함으로써, 외모도 명예도 학벌도 아니 사랑까지도 팔고 사는 기상천외한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화가 AI시대로 급속히 전환함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노년들은 말한다 ‘물질적 풍요로움에 없는 게 없는 세상이기도 하지만, 정녕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져 버린 세상’이라고 ~ ‘질문이 없다. 믿음이 없다. 눈물이 없다. 사랑과 정이 사라졌다. 절제와 나눔이 부족하다. 신체는 편해졌지만 정신적 휴식이 없다’라고 입을 모은다. 가장 심각한 사례로는 물질만 추구하는 어른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가 죽임으로까지 버림을 받고, 나날이 벌어져가는 격세지감의 강도로 존경받지 못하는 노년은 삭막하고 외롭다. 초고속문명에 도외시 당하는 노년의 가을이 더할 나위없이 쓸쓸하게 깊어만 간다. 
  인터넷 정보의 홍수 속에서 연륜의 가치와 윤리 도덕성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삶의 가치관과 정신적 혼란스러움이 가중되는 시대라 하겠다. 너도나도 살아가기가 힘들다며 격렬한 분노의 깃발로 하늘을 찌르는 일상이 되었다. 어느 시인은‘눈물과 슬픔은 어디에도 없는데 슬픔 대신에 울분을 폭발하는 시대라.’고 토하였다. 인체의 하드웨어격인 신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리하게 전환되었지만,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마음, 정신, 영혼은 피폐해져 가는 아이러니함이라 하겠다. 초고속문명 속에서 순하고 둥근 것들은 점점 허물어져 가고, 옛것은 점점 사라지는 양상을 회피할 수 없음이다. 가속 페달만 밟아대는 세월 속에서 노스텔지어의 묵은 씨앗들만 풀풀풀 날리고 있음을 어이하랴 ~. 시간의 헛바퀴들이 줄달음하는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달려보아도 쉽게 지쳐버리는 건 또 왜일까? 쉽사리 해갈되지 않는 마음의 갈증과 불쑥 타오르는 목마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
  천지에 물질적인 것들이 너무 많이 널려서 삶의 잣대가 삐꺽거리는 소리 가득하고, 꼭 필요한 정신적인 지주들이 사라지는 위태로움은 슬픔을 넘어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물질만능주의 차가운 벽에 부딪히는 현실을 모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에, 정신적 가치의 추락을 예방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관을 회복함에 정성을 들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절제의 미학을 생활화하고 나눔의 철학을 정립하여 실천하는 태도가 절실한 시점이다. 밤새 슬픔에 고인 이슬로 씻겨진 구절초의 하얀 미소에 가을은 점점 깊어가는데, 내면의 풍요로움을 위한 자구책으로는 내 손안에 책 하나면 충분할 것이리라. 계절감성에만 빠지려드는 자아를 맑게 정화해 줄  길라잡이를 펴고 주마가편(走馬加鞭)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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