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인 항일 독립 운동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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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인 항일 독립 운동사 <3>
  • 보은신문
  • 승인 1991.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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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향의곡(我鄕義哭)
외속리면 구인리편 (대정8년 형 제292호)
서지리에서 항일 운동이 시작된 지 3일이 되어서 구인리에서 또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폭력과 강압으로 지배하던 일제 경찰은 항일 운동을 예방하고자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은 역사적으로 미루어 보아 얼마나 가혹한 식민지 지배정책을 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같은 우리민족이면서 일본에 아부하여 순사가 되고 군직원, 면직원이 되어서 일본인들이 주는 '지까나비'를 신고 '각반'을 치고 긴 칼을 차고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는 의로운 의사들을 체포하는 앞잡이가 되었으니 이것이 민족적인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시로서는 일제에 아부하고 아첨하는 자가 제 나라와 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의 권력과 명예를 등에 업고서 남이야 도탄에 빠지건 말건 저만 잘 살고 저만 편안하면 그만이라는 친일파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면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인데도 단기4252년(대정 8년 기미년 서기 1919년) 3월11일에 당시 탄부면 구인리와 길상리에 거주하던 의사들의 주도하에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당시의 조선총독부 재판소의 판결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정 8년 형 제292호 판 결 충북 보은군 탄부면 구인리 농업, 피고 李 昌 善 당26년 동소(同所) 농업, 피고 李 당 26년 동소(同所) 농업, 피고 金 用 석 당26년(호적에는 金用石으로 되어있음) 동도 동군 동면 길상리 농업, 피고 李 당31년 위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 문 피고 李昌善을 징역 10개월에 처한다. 피고 李寅夏, 金用燮, 李準永 을 각각 징역 6개월에 처한다. 압수물건은 차출인에게 환부한다.

이 유 파고 이 창선은 조선 독립 시위운동을 발의하고 피고 이인하, 김용섭, 이준영등 3명은 이에 찬동하여 공모한 끝에 대정 8년 4월11일 하오 피고 김용섭이 꽹과리(징인 것 같음)를 두들겨 부락민을 모으는 한편 피고 이인하, 이준여은 마을을 돌면서 사람들을 모아 이들 수십명을 이끌고 구인리와 길상리 뒷산에 올라 조선독립 만세를 외쳐 치안을 방해하였다. 이상의 사실은 피고 등의당 법정에서의 판시 사실과 동일한 요지의 공술 및 사법경찰관의 각 피고에 대한 심문조서 가운데 판시 내용에 부합되는 요지의 공술 기재와 압수된 꽹과리의 현존함을 종합하여 이를 인정한다……<중략>……따라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조선총독부 검사 청수 원 관여하다.

대정 8년 5월1일 공주 지방 법원 청주지청 조선총독부 판사」 이렇게 법정 판결이 나자 네 의사들은 분하고 억울하여 대정 8년 6월7일 경성 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대정 8년 7월1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렇게 되어 이창선 의사는 서대문 형무소 3년, 이인하, 이준영, 김용섭 의사는 청주형무소 2년씩(보은 군지 참조)의 아비지옥 같은 복역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이 네명의 의사들을 체포한 순사가 조선인이며 검찰에서 조서를 받은 사람도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고 이렇게 일제의 충견노릇을 한 민족적 반역자들을 8·15 해방 후에 처벌하지 못하고, 처벌은 커녕 또 공직자들로 체용한 것을 생각하면 위정자들이 오늘날 이처럼 험악한 사회를 만든 시발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인리 의사들의 후손이 이 고장에 살고 있지 않아 아무도 만날 수가 없어 당시의 좋은 이야기나 고행담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인하 의사의 아들 이은학씨는 무척 가난하여 대여양곡을 갚지 못하고 야간도주 하다시피 타향으로 떠났다는 풍문을 들었고, 이준영 의사는 체포당하던 날 순사와 격투를 벌여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구인되어 일찍 별세하였다는 것이고 이창선 의사는 손톱밑을 대까치로 쑤시는 등 많은 고문을 당하여 외손을 죽을 때까지 앓다 작고 하셨다고 길상리 거주 이준성씨가 전한다.

현재 삼산국민학교에 재직중인 배명환 교감의 말에 의하면 이창선 의사는 조부와 친숙한 사이여서 명절 때 이 의사가 찾아오면 조부님이 불러서 큰 절로 인사를 시켰다고 한다. 당시 이 의사는 넓적하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눈매가 매섭고 큰 키는 아니나 체구가 당당하던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이준영 의사의 손자인 이헌영씨는 대전에서 살고 있어서 바쁜 중에도 보관했던 판결문을 우송하여 주었다. 다만 직접 만날 수가 없어서 섭섭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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