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국격(國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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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국격(國格)의 의미
  •  양승윤(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3.09.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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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페이(Michael Fay)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1994년 5월 18세 미국 소년에게 싱가포르 정부가 타인이나 공공의 재산을 파괴하여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4대의 태형(笞刑)을 가하고, 징역 4개월에 3,500 싱가포르 달러(340만 원)를 벌금으로 부과한 사건이다. 싱가포르의 미국국제학교 재학 중이던 마이클은 1993년 9월 열흘에 거쳐서 주차된 차량 18대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거나 날카로운 칼끝으로 차체를 긋고 달걀을 던져 외관을 훼손하였다. 이 사건으로 4년 동안 싱가포르와 미국은 외교적 갈등을 겪었다. 미국 조야가 ‘발끈’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경범죄 수준의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에 상응하는 벌금을 부과하면 되고, 징역형까지 갈 사안이 도무지 아니며, 더구나 나이도 어린 미국 시민에게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태형을 가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 대법원장이 싱가포르 대법원장에게 선처를 탄원하였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20여 명의 상원의원이 서면으로 양국의 기존 우호 관계와 청년들의 건설적인 미래를 위하여 외교적으로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리콴유(李光耀) 당시 내각 선임장관은 엄정한 사회질서는 싱가포르의 생명선과 같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이 나섰다. 그는 싱가포르 사법당국의 결정이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라며, 고척통(吳作棟) 총리에게 미국은 무역과 관광 분야에서 모종의 조처를 취할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 총리도 요지부동이었다. 태형은 예정대로 집행되었다. 옹텡청(王鼎昌) 대통령은 형 집행을 재가하면서 기존의 6대를 4대로 2대를 경감해 주었다. 싱가포르-미국 관계는 1997년 11월 뱅쿠버 APEC 총회에서 클린턴-고척통의 양자 회담으로 비로소 정상화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중국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1978-83), 중앙군사위 주석(1981-89)직을 역임하였으며, 1978년부터 기존의 폐쇄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 경제를 일으킨 개혁개방정책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평소에 화교들이 상권을 쥐고 있는 동남아를 중국의 앞마당쯤으로 생각하였다. 1978년 11월 덩은 화교들의 대중국 투자유치와 중국을 중심으로 동남아의 화교 사회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하여 동남아 순방에 나서 태국과 말레이시아를 거쳐서 국민의 76%가 중국계인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다. 덩샤오핑은 리콴유 총리의 환영 만찬에서 중화인민의 국제적 연대를 역설하면서 싱가포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답사에서 리 총리는 덩샤오핑의 면전에서 ‘우리 싱가포르 국민은 모두 싱가포르인(Singaporean)’이라며 중화인민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덩은 또 베트남이 통일(1975.4)된 뒤 중국과 동남아는 베트남의 팽창야욕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언급하자, 이를 맞받아 “통일 베트남이 포함된 모든 동남아 역내 국가는 중국의 공세적인 남진정책을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쐐기를 박았다. 
   싱가포르의 이웃 인도네시아의 최대 일간지 콤파스는 리콴유 사거(死去) 이튿날인 2015년 3월 24일자 1면에 리콴유가 쟈카르타 소재 칼리바타 영웅묘지에 꽃을 뿌리는 장면의 사진을 싣고, 이런 설명을 달았다. “리 총리가 1968년 싱가포르에서 교수형을 당한 인도네시아의 두 해병 우스만과 하룬의 묘역에 꽃을 뿌리고 있다.” 1973년 리콴유가 수하르토(Soeharto)가 쿠테타로 집권한 인도네시아 방문을 희망했을 때, 수하르토는 사실상 리 총리가 죽인 두 해병에게 꽃을 바치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리콴유는 기꺼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73년 5월 27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5월 28일 한 때의 적국이었던 인도네시아 수도 쟈카르타 소재 영웅묘역을 방문하였다. 1963년 9월 싱가포르와 보르네오 북부의 사바와 사라왁을 아우르는 영연방 말레이시아가 출범하자,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Soekarno)는 이를 비동맹의 맹주인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여 즉시 대결정책을 선언하고,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특공대를 보냈다. 싱가포르에 잠입한 두 해병은 1965년 3월 10일 번화가 오챠드 거리의 맥도날드 건물에 폭탄을 장착하여 33명의 사상자를 내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1966년 수하르토가 등장하고 대결정책이 종식되면서 인도네시아 신정부는 싱가포르에 두 해병의 사형을 재고하라는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는 3년 후 이미 정해진 수순에 따라 국가전복 혐의로 두 해병을 교수형에 처했다. 동남아의 소국 싱가포르는 엄정하게 국격을 지키는 나라다. 이 나라가 외교적 관계를 항상 유념하는 세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중국과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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