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향토문화를 찾아서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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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향토문화를 찾아서⑵
  • 보은신문
  • 승인 1991.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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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
법주사의 규모 이런 문화유산인 우리 법주사는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으며 기록마저 빈약하여 옛 모습을 가상으로 더듬어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규모를 집작할 수 있는 자료는 <법주사 사적기>인데 이것은 고종10년 서기 1873년에 편찬된 것으로 법주사 경내 건물이 60여동이나 되고 석물이 10여점, 계곡의 암자도 70여개소나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법주사 경내에는 미륵부처가 있는데 옛날 기록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기록에 의하면 미륵 부처는 용화전 안에 모셔져 있었으며 금산사의 용화전과 같았다. 사적기에 의하면 용화전 속의 청동미륵불은 고종11년 서기 1872년에 파괴되었다 전한다. 자료에 의하면 청동미륵대불은 고종 2년∼9년(서기 1865∼1872) 경복궁 재건시 국가재정을 충당키 위하여 뜯어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1939년 당시 주지 스님인 장석상 스님과 김수곤 거사의 추진으로 공사를 시작, 김복진씨가 공사를 맡았으나 공사도중인 1947년 세상을 떠나자 공사는 다시 중단돼 미완성인채 세월이 흐르고 그 뒤 4공화국 당시 육영수여사의 시주로 신상균씨가 맡아 공사가 시작돼, 1964년 음력5월15일(양력 6월14일)에 거대한 시멘트 미륵부처의 점안식을 올렸다. 청동불이 파기되고 100년, 공사 시작후 50년만에 세워진 미륵부처상의 모습은 동양 최고였다.

그러나 그 역사가 말하여주듯 완공한지 26년만에 불상이 균형을 잃어 파괴 일보 직전에 이르자, 1984년 6월에서 1985년 4월 사이에 주지 유월탄 스님이 새로이 미륵불 조성을 발원하고 1986년 10월19일 기공식을 가지면서 다음해 4월20일 거대한 시멘트 미륵불상은 해체되었다. 해체과정에서 200여점의 복장 유물이 나왔는데 그 유물의 일부는 현재 지하법당에 전시중이다.

1988년 12월18일 청동미륵대불 불두가 올라감으로써 완공이 되고 108평의 지하법당에 반가사유상을 봉안, 1990년 4월11일 회향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유월탄 주지의 열의와 6년간의 고생 끝에 세워진 청동 미륵대불의 회향식날, 하늘에서 오색서광이 세 번이나 비춰 3만의 참석신도를 감동케 하기도 했다. 이로써 지금의 법주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속리산 법주사와 같이 찬란하고 수려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군민은 이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내고장 향토 문화를 잘 지켜 후손에 길이길이 물려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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