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우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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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우리 사랑 
  • 양승윤 (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3.08.10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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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의 날은 1964년 사상 처음으로 연간 1억 불 수출달성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수출품의 상위 40%는 섬유제품, 합판, 가발 등 세 품목이었고, 그중에서도 섬유제품은 압도적인 1위였다. 1967년에 세워진 구로공단은 70년대 중반께 이미 10만 명이 넘는 종사자를 거느린 한국 제조업의 메카였다. 장안의 화제가 70년대 내내 구로공단이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TV를 비롯하여 각종 미디어가 구로공단을 넘나들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있다. 구로공단에서 만든 와이셔츠가 미국 뉴욕항까지 상품가, 운임, 보험료 합쳐서 장당 1달러라는 것이었다. 요즘 환율로 1,300원 남짓한 가격이다. 
   필자는 당시 구로공단에서 머지않은 계동공단의 인턴급 초년생이었다. 계동공단은 1974년 1월에 창단된 사립학교교원연금관리공단의 별칭이었는데, 초창기 사무실의 위치가 종로구 계동이어서다. 사학연금공단으로 약칭하였는데, 공무원연금(1960)이나 군인연금(1963)에 비해서 10년 넘게 늦게 출발하였다. 국공립학교 교원은 교육공무원으로 처음부터 연금수혜를 받았다. 그러나 사립학교 교원은 국공립보다 월등하게 많았으나 연금이 없고 퇴직 시 국영기업의 퇴직금 제도에 준하는 퇴직 일시금을 받았다. 당연하게 학교마다 사정이 달라서 항상 뒷말이 많았다. 
   종로구 계동 구 휘문고교 앞 도로변에 있던 사학회관 3-4층을 임차해서 연금업무를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현대그룹 본사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74년 10월 첫 공채가 있었다. 서울신문에 성냥갑 표면 크기의 광고가 실렸다. 가스라이터가 흔해지기 전에 끽연자들은 모두 성냥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공무원연금공단에서 스카웃된 두 경력자를 포함해서 40명의 고졸 여직원과 대졸 수준의 상식과 논술시험을 거쳐 8명의 경력직 남자직원이 10배수 가까운 경쟁을 뚫고 모였다. 주사급 4명과 서기급 4명이었다.
   무경력 필자는 서기 말 호봉, 직책은 총무과 허드렛일 담당이었는데, 용도(用度)라는 직책이었다. 김 군과 민 양 등 두 사환의 도움을 받아 보리차를 끓이고, 사무용품을 구매하고, 연금카드 등 각종 서식 인쇄를 발주하고, 숙직실 침구를 세탁하고, 우편물 수발신이 주요 업무였다. 보리차 끓이는 전열기는 고장 나기 일쑤였다. 그 밖에도 청색 전화기 신청하는 일로 수시로 광화문전화국을 드나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업무는 폭증하는데 통신 사정이 따라가지 못했다. 구매 가능한 백색 전화기는 엄청나게 비쌌고, 관용 청색 전화기는 몇 번을 신청해도 차례가 오지 않았다. 연금업무 문의 전화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민원인이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 못하면, 구로공단 하급 종사자를 빗대어 막말을 해대기도 했다. 그럴 때는 한참을 참으면서 듣고 있다가 “여기는 구로공단이 아니고 계동공단입니다.”라고 대꾸했던 것 같다.
   초창기 공단 사무실 환경은 열악했다. 식당이 없었고, 화장실이 비좁았다. 사내 민원함에는 여직원 전용 화장실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잇달았다. 사무실 바닥 청소도 초창기 3개월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필자의 업무겠거니 생각하고, 다른 직원들 보다 일찍 출근하여 30분가량 재빨리 물걸레질하고, 계동을 한 바퀴 돌아 사무실로 돌아왔다. 동료 서기 한 분이 기꺼이 동참해 주었다. 청소용역을 잠시 대역한 우리 두 서기는 평생을 두고 간직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경주 첨성대 이외에도 종로구 계동과 원서동 경계에도 세종 때 설치한 관상감(觀象監)터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서울 종로에도 첨성대가 있다. 
   사학연금공단은 교육부 산하 기금관리형준정부기관으로 초창기에는 교육부 차관이 이사장을 겸임하였다. 명칭도 두 번 변경되었다. 사립학교교원연금관리공단(1974)에서 사립학교교직원연금관리공단(2000)으로, 다시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2010)으로 변경되었다. 계동공단으로 별칭하던 종로구 계동 사무실에서 1982년 여의도 사학연금회관으로 이전하였다가, 2014년 12월 혁신도시 개발 이전계획에 따라 전남 나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사학연금은 공무원연금, 군인연금과 더불어 3대 공적연금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공단은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서 연금업무를 시작하였다. 만 3년 같이 일했던 그때 그분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다. 만수장, 복승각, 계동다방은 화제의 공통분모다. 만수장은 아직 그 자리에 있는 해장국집이다. 한 달에 한두 번씩 한꺼번에 대량 우편물을 발송하고 야근한 직원들이 몰려가 소주를 곁들여서 늦은 저녁을 먹던 데다. 복승각은 중국집, 다섯이 가도 짜장면에 기껏해야 탕수육 한 접시였다. 계동다방은 사학회관 지하에 있었는데, 커피가 유난히 맛있었다. 모두 추억 속에만 남아 있다. 갓 스무살이었던 여직원이 오랜 세월 후 딸을 시집보낸다는 연락을 엊그제 보내 왔다. 참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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