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장맛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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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장맛비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23.06.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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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위를 밀어내고 오랜만에 장맛비가 주룩 주룩 내린다.
잔뜩 지푸린 하늘아래서 쏟아지는 저 비를 보고 있노라면 굵은 빗줄기를 뚫고 “이ㆍ상ㆍ없ㆍ음” 하는 아련한 외침들이 들린다. “이ㆍ상ㆍ없ㆍ음”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서로 알리는 구두통신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신작로변에는 전봇대(전신주, 나무전봇대)들이 굵고 강한 전선을 잡고 일정간격으로 도열해 서 있었다. 모두들 호롱불을 켜고 살던 때로 가정에 전기전등은 없었고 그 전선은 일제시대(강점기) 부터 쓰던 굵은 전화선이었다. 그 철선은 스케이트의 얼음과 맞닿는 밑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북한 공산괴뢰군이 남침해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린이들은 그저 노는 데만 정신이 없었다. “밤중에 산꼭데기에서 ‘영차, 영차’하고 떠드는 소리가 안마을의 ×× 패거리였던 기라”하고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데 해방 이후 얼마 안 된 그때는 각 동네마다 소위 “빨갱이”라고 하는 “사상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우리 동네에도 천석꾼 재산가인 “빨갱이 두목”이 있었는데 그는 ‘구장’(지금의 이장)이셨던 아버지와는 개인적으로도 잘 아는 사이로 우리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박사”(이승만)를 존경하셨던 아버지는 그 사람과는 사상적으로는 거리를 두었지만 친절하게 상대는 해주셨다.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 빨갱이군대가 어디까지 쳐내려 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모심고 논밭 메는 동네사람들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고 무더위를 피해 정자나무 큰 그늘 밑에서 하얗게 모여 앉아서 더위를 피하는 모습은 오히려 평화로워 보였다. 우리보다 큰 아이들은 싸릿대 소쿠리로 개울을 밟아서 미꾸라지를 잡고 어린애들은 속력이 느리고 흔들흔들 무력한 올챙이와 울직임이 짧은 ‘눈쟁이’(갓태어난 눈이 큰 물고기새끼)를 잡았다.
다만 동네 구장집인 우리집 작은방에는 “향토방위대”에 조직된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가야산 높이 솟아 반도강산 삼천리 …” 하는 노래를 합창하면서 칠판에 뭔가를 쓰면서 강의도 했다. 많게는 50대가 넘는 미군용차량의 후퇴가 계속 이어졌다. ‘지엠씨’트럭과 찝차인 ‘쓰리쿼타’, 옆에 한사람 붙여놓은 오토바이 들이 행진하다가 동네앞 신작로에 죽 늘어서서 정차한채 차 안에서 식사를 마친후 떠나곤 했다. ‘뻔지가 좋은 ’ 형들은 그 앞에 가서 “할로 할로” 하고 수작을 부렸고 식사하던 미군들은 보다 못해서 ‘간즈메’를 한두 개를 주기도 했다. 어린이들은 형들이 자기 혼자만 ‘간즈메’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침에 전봇대의 전선이 모두 끊어져 있음을 보고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동네사람들은 인민군이 산을 넘어와서 전선을 끊어놓고 갔다고 했다. 이날 이후 갑자기 신작로에는 약 100미터 내외 간격으로 청년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가끔씩 “이상없음” 하는 소리로 서로가 연락을 주고받고 했다. 약 5리 정도 떨어진 성산지서에서 급박한 지역상황을 알기 위해 이렇게 비상으로 구두통신선을 만들어 전황을 파악하려고 지시한 것이었다. 어느 장맛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우리집 길가 쪽마루에 도롱이를 걸친 동네사람이 앉아있다가 저 위쪽에 있는 집에서 내다보고 있는 사람에게 아주 큰 소리로 “이ㆍ상ㆍ없ㆍ음”하고 외쳤다. 그 사람은 그 말을 받아서 곧바로 같은 말을 저 멀리 앞에 있는 사람에게 외쳐댔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가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지서에서 주민들에게 피난을 가라고 했다. 우리도 보따리를 이고지고 피난생활이 시작되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급박하게 후방의 상황을 알리던 그때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 어려웠던 시기에도 내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님이 같이 계셨기에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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