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허당 그리고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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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허당 그리고 겸손
  • 김종례(문학인)
  • 승인 2023.03.2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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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춘분이다. 아침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올 때면 숲속의 텃새들은 후루룩거리며 하늘로 오르고, 날아드는 봄 햇살에 여기저기 새싹들도 쫑긋쫑긋 얼굴을 내미는 요즘이다. 수선화, 튜울립, 마가렛 새순들이 차례차례 안부를 물어보며 아는 체를 한다. 기세등등했던 겨울바람이 허당하게 달아난 곳마다 예고도 없이 기척도 없이 자리잡은 봄이다. 마치 맡겨놓은 보따리를 찾으러 온 단골손님처럼 친근하고 당당하게 찾아온 봄이다. 떠오르는 태양은 점점 당당하게 성급해지고, 넘어가는 석양은 점점 희미하니 늦장을 부릴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당당함과 허당함은 대립적인 것 같지만 양존관계이기도 하다.‘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젊은 날의 당당함은 긴 세월 속에서 몇 번인가 곤두박질치고 부서지며 예까지 온 것이리라. 세간에‘늙어간다는 것은 익어간다’는 말도 있다. 자칫 젊은이의 시선에는 나이든 이들이 스스로 위로하는 말이라 하겠지만, 그 허당해 보이는 모습에 감추어진 인생비록을 젊은이야말로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오랜 연륜의 침묵과 느릿한 걸음 속에 습득된 자연스러운 귀결점 겸손을 말이다.
  어느 월간지 통계적 자료에 의하면 당당한 사람보다 허당해 보이는 사람이 대인 관계를 잘 엮어간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스런 조율의 잣대인지 모르겠다. 너와 나의 인과관계는 곤두박질치는 스펙이나 당당한 명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생 여정길 마음수련에서 획득한 영혼의 이름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뭘 모르는 사람이 뭘 아는 사람 앞에서 당당한 자세를 고취하는 경우가 많지만, 허당은 할 말을 몰라서가 아니라 명분 없는 당당함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경우가 참 많다.  
  인간관계의 꽃이라 하는 부부관계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입을 일찍 닫아 버리는 쪽이 지는 것만 같지만, 당당하게 공격하던 반쪽은 허당하게 물러서는 반쪽에게 늘 마음의 빚을 지며 살았음이 아닌가. 또한 젊은 자식들은 늙어가는 부모 앞에서 왜 점점 당당해지는 걸까? 부모는 젊은 자식 앞에서 왜 점점 시무룩 과묵해져 가는 것일까? 부모 역시 할 말을 몰라서가 아니라,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허당의 자세를 취하는 길이 온 가족이 평안한 길이란 것을 부모는 알고 자식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일반적인 속설도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벼이삭은 여물수록 고개를 숙이고, 사람은 나이 들면서 겸손하게 물러서는 게 진리인가 보다.
  문득 세상에 흘러 다니는 유머스런 잡담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나이 50이 되면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매일반이며, 나이 60이 되면 잘생긴 얼굴이나 못생긴 얼굴 모양새가 비슷해진다. 70이 되면 반쪽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같은 하루가 지나고, 80이 되면 재력의 여부를 떠나 초췌해지기는 매일반이니, 명품이 품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즉 저마다의 인생길에서 종착역을 향하는 자연스런 라이프 변곡선을 풍자한 유머이리라. 학력이나 학식, 재력을 많이 쌓아 스펙이 화려하여도, 고급화장품이나 보톡스로 변신을 꾀하였다 해도, 끝내는 자연의 섭리 노화에 항복하게 된다는 말이리라. 이처럼 세상적으로 판단할 때는 당당함이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겸손의 덕목으로 무장한다면 오히려 허당함이 복을 받는다는 성인의 가르침도 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자, 슬픈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을 지어다’라는 진리에 의지하여, 세상적인 궁핍함을 정신적 부유함으로 전환시킬 지혜도 필요하리라. 하늘에 닿을듯 한 당당함이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혼미하게 할 것이기에, 끝내는 피할 수 없는 허당의 시간은 꼭 돌아올 것이기에, 말씀대로 늘 겸손하고 조신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당당한 오르막길에서도 허무한 내리막길을 예상할 것이며, 바닥에 떨어질 때도 의기소침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릴 일이다.    
  나도 까닭 없는 당당함에 짓눌려져 허당하게 물러서거나 돌아설 때마다, 겸손의 보배를 찾아다니는 자신을 알아차린다.‘당당함으로 방황하던 젊은 날에는 허당함이 이리도 편한 것임을 왜 진작 몰랐을까?’도 되뇌이면서 ~ 어느새 고희에 접어들었으니 어찌하랴! 德生於鼻退(덕생어비퇴) 過生於輕慢(과생어경만)을 마음판에 새기면서 당당하게 노년을 대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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