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여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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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여윈씨
  • 양승윤(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3.03.1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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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잘못 가르쳤더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던데.” 하는 고백은 어렵다. 더구나 선생의 입장에서 잘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가르쳐놓고, 졸업해 나간 제자들에게 잘못 가르쳤노라고 다시 알리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년퇴직 10년을 남겨놓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지난 20년 동안 잘못 가르친 것이 많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고민하게 되었다. 애프터 서비스를 하기로 맘먹었다. 그래서 귀국 후부터 이메일 주소가 닿는 졸업생들부터 매월 말 지난 세월 수업과 관련된 잡문 에세이를 써 보냈다. 주로 ‘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흔한 자료를 재인용하면서 발생했던 오류가 주요 주제였다. ‘그랬었네요’하는 회신이 꽤 많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애프터 서비스용 잡문을 꼬박꼬박 모아 정년퇴직 기념 에세이집으로 만들어 온 후학도 있었다. 
   경쟁 사회의 최일선에 있는 대학은 선생들에게 많은 연구실적을 내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압력을 가한다. 본봉 말고 연구비를 실적에 따라 상중하로 차등 지급하기도 하고, 저명한 국제저널에 실리면 크게 포상하기도 하고, 매 학기 학교 전체와 단과대학별로 연구실적을 가장 많이 낸 선생에게 소정의 특별 상여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재탕 삼탕이 발생하는 이유다. 실적을 양으로 재단하는 선생들의 연구는 내용이 부실하거나 기존의 논문을 이리저리 자르고 붙여서 재편집한 것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이런 것도 빠짐없이 사이버 공간을 차지하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얼마 전 보은신문에 올린 ‘민들레 영토’는 선배 한 분이 보내온 토막글 ‘앉은 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쓴 소품이었다. 그 잡문 에세이가 나간 후 어렵게 모시는 원로의 오래전 글을 단골 출판사 <시와 진실>에서 찾아 보내왔다. 제목이 홀씨와 여윈 씨다.
   ‘홀씨’와 ‘여윈 씨’
   ‘민들레 홀씨’라는 잘못된 말이 3~40년 전부턴가 나와 어이없이 마냥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몇 줄 적는다. ‘홀씨’는 곰팡이나 버섯 같은 하등식물 무성(無性) 생식 세포를 말하는데, 어쩌다가 엉뚱하게 어느 유행가 가사 중에 “민들레 홀씨 되어…”라는 것이 잘못 나와 자꾸 퍼지는 바람에, 심지어 2001년 가을 어느 신인문학상 당선작 시 제목에까지 “민들레 홀씨 날리듯”이라는 것이 있었다. 또 2002년 봄 서울 지하철 안 ‘텔레비전’ 광고 동영상으로 등장한 경기도 어느 전원도시 홍보물에도 꽃 그림과 함께 ‘민들레 홀씨’라는 자막이 나왔다.
   ‘홀’이라는 접두어(prefix)는 대개 ‘남녀’ 또는 ‘암수’ 한 쌍에서 한쪽이 결여 되었을 때 쓰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부 중 한쪽이 결여된 상태를 나타내느라고 ‘홀아비, 홀어미, 홀시어머니, 홀 시누이…’ 같은 말을 쓰고, 꽃이 피는 보통 식물과 달리 곰팡이, 버섯 같은 하등식물은 무성생식(asexual reproduction) 세포 하나로 번식하기 때문에 이런 생식세포를 ‘홀씨’(胞子/spore)라 하는 것이다. 민들레는 이른 봄에 노란 꽃이 피어 벌, 나비를 부르니 거기에 ‘홀씨’라는 말이 전혀 당치 않다. 바람에 날리는 그 가벼운 씨는 ‘여윈 씨’(achene=에이키인/瘦果=수과)라 한다. 바람을 타고 가볍게 잘 날아가도록 수척(瘦瘠)한 씨앗이라는 뜻이다.
   시인은 과학자만큼 생물학 지식을 모른다 해도 너무 상식에 어긋나는 술어를 시에 섞어 잘못 퍼트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족(蛇足)이지만 영국사람들은 생물학자나 시인이 아니라도 산(山) 새 이름, 들꽃 이름을 잘 아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미국인은 대개 그렇지 않다고 함), 한국 문인들이 쓴 글에 “이름 모를 새들” 또는 “이름 모를 들꽃”이라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는 말을 듣고, 명색 문인이 그럴 수 있느냐고 그들이 몹시 의아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어느 대학 영문학 전공 교수들이 늦게나마 산(山) 새 이름, 들꽃 이름 공부하는 동호회를 [맨]들어 동물도감, 식물도감 책도 갖추고, 수년째 산천을 누비며 그 이름 익히기에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을지언정 잘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세계시민 4호)
   민들레 세상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올부터는 민들레 홀씨 대신 ‘민들레 여윈 씨’로 바꿔 쓰자. 여윈 씨가 다소 생소하지만, 자꾸 쓰다 보면 친근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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