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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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23.02.0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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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밋소니안 연구원으로 있는 교포소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교환 연구원으로 근무할 때 일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 소녀는 무척 명랑했고 우리말은 거침없었지만 모국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자신도 그것을 느꼈는지 어느 날 “과장님, 저 한국노래 하나 알아요”했다. “그래? 한번 해봐라”하니 마치 할머니들이 부르듯이 “삼천리 강산에, 새봄이 오면은, 새봄이 오면은, 농-부-는 바지 벗고 이를 잡는다” 나는 깜짝 놀라 “야- 너, 그 무슨 노래냐? 누구한테 배웠어?”  하니 “삼촌이 가르쳐줬어요.” 했다. 미국 이민2세 소녀로부터 이런 노래를 듣다니... 기가 막혔다.
그랬다. 그 노랫말 속에는 일제강점기에 백성들이 처한 가련한 신세가 그려져 있었다. 어린 자식들과 칼바람 겨울을 버텨낸 끝에 드디어 봄이 왔지만 가난한 살림에 양식도 바닥나 먹을 것도 없다. 더구나 뿌릴 씨앗도 터전도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한 신세가 우리 부모님 시대였다. 양지쪽에 무료하게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지 벗고 넓적다리 벅벅 긁으며 이를 잡는 일 뿐이었다. 가난한 살림에 이는 또 왜 그리 많았던고? 뭐, 먼 옛날 얘기할 필요 없이 수년전 북한에서 탈북한 유명한 여기자가 말한 실화에서 확인이 된다. 소위 “고난의 행군”시절에 먹지 못해 아사자들이 대량 속출했는데 사람이 죽기 직전에는 몸에 있던 이들이 새하얗게 몸 밖으로 기어 나온다고 했다. 숙주가 곧 죽을 것을 이가 먼저 알고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소위 “일제시대”는 전 국민들이 거지가 되었던 시대였다. 어려운 처지는 소규모 농토를 가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힘들게 농사지어 타작해 놓으면 관(일제)에서 나와서 “공출”이란 명목으로 훑어갔다. 백성들은 그 나머지 식량으로 긴 겨울을 견뎌야했다. 그리고 봄이 올 때쯤에는 마지막 양식마저 바닥난다. 초근목피로 생을 이어가야하는 ‘춘궁기’의 시작이다. 모두들 바구니 들고 들로 산으로 소나무껍질(송기) 벗기고 나물 캐러 나온다. 온 들판이 마을 사람들로 하얗다. 빈궁의 삼천리강산이었다. 그리고 그 후 ‘왜놈’들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새 왕조를 만들 탐욕의 김일성의 남침으로 또다시 수많은 국민들이 죽고 전국토가 초토화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세계의 최빈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남침을 했던 북한은 남한보다 잘 살았고 상황은 20년이나 지속되었다. 백성들은 배가 고프니 예쁜 꽃도 고운 줄 모르고 노래소리도 즐겁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만 살아온 우리의 부모님 세대였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가난의 대물림 시대였다. 요즘 ‘뚱식이’ 세대들이 ‘박정희독재’니 ‘민주’니 하면서 겉떠들지만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젊은 당뇨병 세대들이 배곯아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가? 배고픈 백성들에게 ‘민주’니 ‘독재’니 하는 말은 사치품에 불과했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방해꾼들을 배제한 개발독재도 필요했다. 지금 우리가 그 결실을 따먹고 있지 않는가. 그 당시 야당의 대표인 두 김가(金家)들은 오직 정권욕에 사로잡힌 배부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 들어 눕는 등 광태를 보였고 드디어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대통령을 해먹었다. 그리고 둘 다 죽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속상의 돼지머리가 웃을 일이다. 데모도 배가 불러야 하는 법. 정작 배고픈 이는 힘이 없어 조용히 죽어갈 뿐이다. 수면에 떠 있는 것은 부유물이다. 그것들은 더 큰 부와 권력을 얻으려는 배부른 비겟덩이들이다. 그들의 언행은 백성들을 속이기 위한 연기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보고 있다. 비록 어느 누구의 이름이 수억만 번 메스컴에 보도되더라도 역사는 결코 더러운 이름의 편에 서지는 않는다. 그런 부유물은 역사의 찌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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