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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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을 생각하며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22.11.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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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에 와서 산지도 어언 17년이 지났다. 보은을 제3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노력도 했으나 실망했다.
 사람은 눈을 감고 보면 앞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보은에 무엇이 있는가? 법주사, 삼년산성, 정이품송, 그리고 또 뭐?...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서울, 대전 등 도시 사람들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갈만한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가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먹거리는 전라도 음식이나 해변 맛집보다 많이 뒤지고 경치도 탁트인 해안지방보다 못하다.
 결국 보은은 지나치는 길목일 뿐이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군수가 나와서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특별한 실적도 없이 혼자서 12년씩이나 군수를 하면서 자기 이름자 새긴 각종 돌비석들만 남기고 갔다.
 물도 흘러야 하는데 고이면 썩는 법이다. 법주사는 사찰에서 옛모습 잘 보존하고 있어서 명소로서 손색이 없다. 그나마 보은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법주사 때문이다. 삼년산성은 삼국시대의 사적지임에도 중요부분을 하얀 새돌로 신축하여 금세기에 중공군 땅개미군단의 침입을 막으려고 쌓은 것 같아서 실소가 나온다. 천년산성은 돌에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가치가 있는 법. 저것은 문화유적 파괴행위다. 저 신축 돌성에 어찌 정감이 가겠는가? 정이품송은 참으로 우람한 장수노송이다. 저 나무가 수양대군(세조)때에도 저 자리에 있었을 수 있지만 수양대군이 지나갈 때 스스로 나뭇가지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거나 수양이 나무에게 정2품 벼슬을 하사했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전설은 언제나 만들어지는 것.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왕이 기침만 해도 기록되는 “승정원일기”에서조차 왜? 한마디도 없을까? 문제는 보은군이 왜 하필 폭군 수양대군(세조)에 매달리는가? 내세울 보은 인물이 그렇게나 없던가? 단종의 위를 찬탈해 죽인 왕위욕심으로 행한 역적이었다. 동생 안평과 금성 양대군을 죽였으며,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켜 성삼문 등 사육신을 능지처참해 죽였다. 1456년 7월 10일 군기감 앞에서 수치스럽게도 모든 조정 신료들이 지켜보는 행해졌고 가솔인 남자를 전부 죽였으며 여자는 노비로 만들어 소위 분배해주었다. 세조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런 세조의 꿈에 형수인 문종의 비가 욕을 하며 뱉은 침이 도져서 불치의 문둥병이 되었다. 그 병을 고치려고 이곳 보은까지 딱 한번 왔었다. 신미대사를 만나고 불교식 수륙제도 지냈다. 보은군에서는 왜? 세조라는 인간을 숭상하여 “세조길”이니 “목욕소”니 하는 말을 만들어 보은군민들이 세조를 그리워하는양 호도하는가?
 보은군은 보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결초보은”이란 단어에 자위하거나 인구증가를 위해서 나가있는 보은사람들의 주민등록을 가져오도록 권유하는 등의 궁색한 짓보다는 지역감정을 버리고 찾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와서 살겠다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이미 와서 사는 귀촌인들에게는 외지인이라 괄시 말고 그들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지인들을 끌어와서 보은에 살게 하는 홍보대사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장, 부녀회장 등 하찮은 직도 큰 감투로 여겨 “남 줘서는 안된다. 우리가 다 먹어야 한다”는 좁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보은군 발전을 위한 자문위원회 등도 자문을 듣기이한 목적보다는 위원이란 감투욕에 같은 생각을 처사를 한다면 보은은 영영 구제하기 어려운 산골 무당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충남 홍성출신 매죽헌 성삼문의 죽기전 시 한수가 애달팠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에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라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하니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오?” 
-북을 처서 사람의 목숨을 저리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려 (하늘을)보니 해가 지려 하는구나. 황천에는 주막도 없다고 하니 오늘밤은 누구네 집에서 잠을 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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