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지절 한나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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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지절 한나절에
  • 김종례(문학인)
  • 승인 2022.10.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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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간을 찔끔거리던 가을비도 멈추고 오랜만에 아침햇살 눈부시기에, 겉옷을 걸치고 마당을 돌아본다. 꽃이 피었다 진자리마다 적선의 두레박처럼 두 손을 내밀면, 씨앗들을 우수수 쏟아내는 요즘이다. 까만 옹이로 박힌 시간의 무게가 가슴으로 전해지는 순간이다. 한 줌의 흙에 부식되어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는 진정한 부활을 꿈꾸나 보다. 키다리 코스모스가 비바람에 쓰러져 있는 장독대 앞을 지날 때, 언뜻선뜻 청초한 꽃빛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어머나! 봄부터 이 잡동사니 넝쿨 속에 숨어서 묵묵히 때를 기다렸나 보네!’기특하기 이를 데 없는 국화 꽃무더기가 은군자(隱君子)처럼 귀티가 난다. 국화는 한해의 마지막 시즌에 찬 서리 맞으며 피어나기에,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상징하는 국민의 꽃이 되었나 보다. 작은 정원의 국화도 무언가 내게 할 말이 많은 듯하여, 오랜만에 귀향한 나그네처럼 국화앞에 쪼그려 앉아본다.    
  이렇게 가을이 깊어갈 무렵에야 함초롬히 피어나는 국화 앞에서, 주옥같은 시상을 쏟아낸 시인들이 떠오른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애송되는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이다.‘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로 시작하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로 끝나는 이 시는 아이부터 노년까지 누구나 한번쯤 읊조려보는 가을의 시가 되었다. 또한 김재진 시인의 국화 앞에서는‘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이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을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라고 예찬하였다. 사람이 국화처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 것일까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국화의 이미지는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고고한 자태로 앉아서, 순박하고도 맑은 빛깔을 발산함에 있다. 우여곡절 풍상을 다 겪으면서 애잔하게 피기에 절개를 뜻할 뿐만 아니라, 꼿꼿한 선비정신, 부귀영화, 장수, 현숙한 사랑 등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현란하지도 칙칙하지도 않은 저 다양한 꽃빛을 무슨 형용사나 언어로 묘사할 수 있으랴만, 이 나이에 다시 재래종 국화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닌가 싶다.      
  분주한 손길을 잠시 멈추고 국화를 마주하노라니. 지나온 여정길이 자막처럼 스쳐가며 내 삶의 현주소를 생각하게 한다. 무심코 세월을 따라오느라 뒤돌아 볼 시간이 없었던 건지, 지나간 여정의 무상함을 비로소 깨닫는다. 라일락 향에 취해서 팔랑거리던 젊은 날에, 근시안의 실체들은 내 영혼을 성숙시키지 못했다는 각성도 일어난다. 이제는 죽어가는 지인의 침묵도 덤덤하게 바라보아야 할 때가 되었음을, 가까이서 함께하는 자들만이 진정으로 사랑해야 될 존재임을 깨닫는 가을이다.
  봄날부터 온갖 수난을 다 견디며 느긋하게 피어난 국화 앞에 앉으니, 나이가 들수록 마음공부가 필요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젊은이들을 더욱 살갑도록 이해하기를, 실패를 바탕으로 성공을 기원하며, 초체해지는 내 모습에서도 영광을 기원해 본다.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는 다 내려놓아야 해결된다며, 비워진 자리가 넓을수록 삶의 보석이 많이 채워진다고, 당무유용(當無有用)의 지혜도 가르친다. 국화가‘몸이 아픈 서러움은 무뎌진 감각으로 지긋이 누르며 살면 돼!’라고 위로를 건네기에, 나도 ‘조급한 욕망으로 판단력이 흐렸던 젊은 날보다 지금이 좋아!’라고 답례를 전한다. 
  집 앞 문전옥답에는 이삭마다 노을이 얹혀 황금빛으로 눈부신 오후이다. 사람도 국화 한 송이거나 이삭 한 다발처럼 진솔하게 맑은 빛깔로 산다면야 오죽 좋으련만~ 인생사 무거운 업보로 넘어지고 부서지며 예까지 온 것이리라. 누구나 허공에 구름꽃 하나 피워내고자 눈물겨운 씨름을 하면서 말이다.‘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누나.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조상들도 사군자중 하나로 칭송하며 예찬을 아끼지 않았던 국화 앞에서의 한나절! 웬지 가뿐해진 마음이 에메랄드빛 창공으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마음속에 무상무념 국화만 가득했던 한나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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