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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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책
  • 양승윤/ 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2.04.2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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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는 평생 책을 모으고, 책을 만들고, 동료와 제자 교수들의 책을 증정받는다. 정년퇴임 학기가 되면, 연구실에 쌓아 놓은 책 정리가 큰일의 하나다. 대개는 학기 내내 조금씩 집으로 실어 나른다. 나도 처음에 마음먹기로는 곰팡이 냄새나는 서울집 반지하에 서재를 꾸며서 커피포트를 준비해 놓고 가끔 내려가 ‘멍’ 때리며 다리 뻗고 앉아서 쉴 계획이었다.
   귀향 준비로도 바빴다. 고향집이 그런대로 정리됨에 따라 매주 아내가 운전하는 승용차로 당장 필요한 소소한 이삿짐과 함께 늦게까지 만지던 책 꾸러미를 실어 날랐다. 아내가 손재봉틀 올려놓고 옷가지를 맘껏 흩어 놓겠다고 꾸며 놓은 조그만 다락방을 먼저 차지하여 컴퓨터 광케이블을 끌어들이고 3단으로 눕혀지는 철제의자까지 펼쳐놓았다.
   잠깐 사이에 두 친구가 타계하였다. 서울 서재도 고향 서재도 정리를 서두르게 되었다. 먼저 간 친구들이 무언의 압력을 가해 와서다. 쌓아 놓은 책더미를 반으로 줄이기로 마음먹고 고향 서재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서울 반지하를 거쳐 왔고, 아내의 거실 서가를 먼저 채웠기 때문에 덜어 낼 책이 많지는 않으려니 했다. 그런데 일단 손을 대고 보니 정리할 것이 꽤 되었다. 그래서 재분류를 하면서 군청에 기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90년대 초부터 가끔 저서를 한두 권씩 고향 도서관으로 우송한 적이 있고 해서다.
   새 책으로 백 권이 채워졌다. 단골 마트에서 가져온 바나나 수출용 소형 박스 두 개에 가득 찼다. 군청에 근무하는 안면 있는 졸업생을 찾았더니 외국에 연수출장 중이라고 했다. 며칠 후, 측량 신청을 하러 간 길에 군청 기획파트 팀장을 찾았는데 자리에 없었다. 수필집도 몇 권 있었지만 동남아 지역학에 관한 외부 증정본이 많아서, 기획업무에 참고가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집으로 오는 길에 전화가 걸려왔다. 책을 감사히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언제라도 가져다줄 수 있다고 했더니, 서가를 준비해 놓고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
   두 주가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어서 메시지를 남겼다. 이틀 후에 회신이 왔다. 읍내 중학교로 보내주시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중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 아니어서다. 출장에서 돌아온 졸업생 전화가 왔다. 다시 한번 책의 성격과 부수, 증정 의도, 전달 방법 등을 설명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도서관에도 전화했다. “예, 교수님 책도 꽤 있네요.” 하면서, 관장님께 여쭙고 바로 연락하겠다고 했다. 거기서도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면사무소에 작은아들 주민등록표를 떼러 갔다가 두어 번 뵌 면장님을 만났다. 차 한 잔 하자고 끄셨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또 예의 책 얘기가 나왔다. 새 건물을 준공해서 빈 공간이 많고 채우지 못한 서가도 여러 개 남아 있다고 했다. 큰 고개를 넘어야 하는 군청까지 가실 것 없고, 가까운 면에 기증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책을 받을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전갈이 왔다.
   내가 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사이에 아날로그 시대는 가고 없었다. 그동안 깜짝 놀랄 뉴스가 많았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2018년 3월 신학기부터 이제까지 서적형 교과서로 공부했던 초중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디지털교과서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5월 12일 KBS 특파원보고 ‘세계는 지금’에서 미국 한 도시의 초등학교 어린이 5명 중 4명이 아날로그 시계를 보고 시간을 읽을 줄 모른다고 보도했다. 두 달 뒤 7월 28일 자 한국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전국적인 조사에 따르면, 전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책이나 신문 등 아날로그 매체를 읽는 한국인들의 비중이 영(零) 퍼센트대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70년대 초 첫 입사시험에 DP&E가 무슨 약자냐는 문제가 나왔다. 필름의 현상, 인화, 확대였다. 코닥(Kodak)의 창업자 이스트먼(George Eastman)은 1888년 세계 최초로 필름카메라를 선보였다. 그 후 코닥은 120년 넘게 코닥 필름과 카메라, 그리고 필름현상소 DP점으로 전 세계를 뒤덮었다. 그러던 코닥이 2012년 파산신청을 했다. 아날로그 시대가 끝난 것이었다. 필름카메라가 밀려나고 전문가용 디지털카메라(DSLR)가 나왔고, 곧 누구나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 세상으로 바뀌었다. 찍기 편하고, 화질이 좋고, 옮기기 쉽고, 저장도 용이하게 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길도 알려 주고, 맛집도 찾아 주고, 책까지 제목만 누르면 낭랑한 낭독 목소리를 귀로 전해주는 세상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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