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의 책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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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의 책략
  • 김옥란
  • 승인 2021.07.1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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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 풀과의 전쟁이다. 풀들은 우리 집 마당에도 진격해 왔다. 나는 바구니와 호미를 가지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모두 뽑아 버리겠어!” 외치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풀들이 사람 말을 하며 사람들의 시를 노래하듯 했다.
 김수영 시인의 <풀>이 들려왔다. “풀이 눕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시에서 풀은 사람처럼 눕고, 울고, 일어나고, 웃는다. 이 시는 풀이 그 자신들을 변호하기에 그만인 시다.
 박성룡 시인의 <풀잎>도 들려왔다.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 우리가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풀은 김수영 시인의 <풀>로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고 연약하게 만들어서 박성룡 시인의 <풀잎>으로 아예 나를 풀로 만들어버리려고 작정을 했나 싶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도 들려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풀이 오만하게 내게 말했다. “풀은 뽑는 것이 아니야. 꽃처럼 곁에 살게 하며 오래오래 자세히 바라보는 존재야. 보면서 예쁘구나! 사랑스럽구나! 감동하는거야. 그러다 풀이 풀꽃을 피우면 칭찬해 주는거야.” 풀의 꼬임에 홀리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개울에 가서 찬물 한 바가지를 마시며 새롭게 작전 수행 결의를 다졌다. ‘어서 풀을 뽑아 버려야지!’ 다시 마당에 섰다.
 이번에는 풀이 조정래 소설가의 <풀꽃도 꽃이다>를 들이댔다. “풀꽃도 꽃이다. 꽃을 피우는 풀은 귀하다. 1등 같은 인생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꼴등 같은 풀생도 소중하다. 풀을 뽑지 말라.”라고 풀들이 외쳐댔다. 그렇게 여러 수법으로 풀들은 나를 설득하였다. 나는 못 들은 척 했다.
 마지막으로 풀은 우리 아버지께서 붓글씨로 쓰신 『명심보감』의 어느 문장을 들려줬다.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 지부장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 (하늘은 녹(능력)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키우지 않는다.) 풀의 소신(所信)을 담은 강력한 주장의 표현이었다.

 나는 풀들의 비범한 책략으로 마음 흔들리다가 차갑고 다부지게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이 고수(高手)의 무법자인 풀들에게 우리 집 마당을 점령당해서는 안 된다! 진종일 푸른 풀을 뽑아서 비탈숲으로 이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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