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차게 흐른 달천은 넓은 모래벌판을 만난다”
상태바
“세차게 흐른 달천은 넓은 모래벌판을 만난다”
  • 박진수 기자
  • 승인 2021.07.08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은의 명소길(50)- 한강의 발원 달천을 따라 문화와 역사를 만나는 길

 

모든 길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길을 오가는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도 하고 역사의 중요한 이야기도 남긴다. 보은의 길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과 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연고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양한 전설이나 역사적인 사건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길, 그냥 편한 마음으로 걷기 좋은 길, 자연과 함께 걷고 싶은 숲길, 그 모든 길을 걸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내북면 봉황리 마을 전경.
내북면 봉황리 마을 전경.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달천의 물줄기는 산외면 이식리에서 한번은 쉬어간다. 배가 쉬어간다는 이곳 이식리에서 길은 하천을 따라 내북면 봉황리와 적음리로 갈라진다.
예전 이 곳 이식리에는 댐목과 물건을 나르는 뱃사공들의 주막이나 쉼터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은 갈라져도 달천의 물줄기는 샛강의 합류로 더욱 큰 강이 되어 흐른다.
산외면 이식리의 달천이 끝나면 내북면 봉황리를 만난다. 이식리와 봉황리가 만나는 지점에 지금은 봉황삼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예전 이 삼거리와 맞다은 맞은편 산 중턱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터거리’ 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지금의 함밭골이라 불리는 골짜기를 따라 7부 능선 계곡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우물과 집터자리, 깨진 기와조각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곳 폐사지 역시 빈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흔히 빈대절터, 빈대절이라고 알려진 절터에는 “중이 고기 맛을 알면 빈대도 남어나지 않는다” 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으며 결국 절이 없어진 이유가 고기 맛을 알게된 승녀의 파계로 인해 번창하던 절이 폐사가 된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봉황리는 본래 달천을 경계로 물 건너는 도리비와 지금 마을이 밀집된 모래부리(沙坪) 두 마을의 옛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봉황리에서 북쪽에 자리한 예전에 마을 뒷산과 뚝에 복숭아 나무가 많아 도엽이라 하던 것이 변해 ‘도리비’ 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모래부리는 도리비 마을 동남쪽에 위치해 있어 달천 강가의 모래땅이 지금은 모두 전답이 되어 있어 ‘모래벌판’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 모래벌에는 달천이 넘지 못한 청벽산이라는 산이 딱 버티고 있다. 모래부리 서쪽에 위치해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막아서 있어 누가봐도 예사롭지 않은 절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봉황리 정면에 위치한 청벽산 절벽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절벽으로 높이 100m나 되며 예전 길이 없던시절에는 절벽밑이 바로 달천이 흘렀다고 한다. 지금은 예전 19번 국도로 인해 길과 하천이 분리되어 있어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변해 있었다.
이 절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그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정도로 많은 사연을 담고 있었다. 이 청벽산의 절벽은 낭사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본의 명치왕이 죽어 조선인에게 상복 입기를 강요하자 이승칠 선생은 상복을 입는 것보다 차라리 그 상복을 입지 않고 죽음으로써 후대에 수치스러움 없는 것이 낫다고 하며 봉황 청벽 꼭대기에서 떨어져 자결하였기에 낭사대라 불리고 있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
몸에 원수의 옷을 걸쳤으니 백대의 치욕이로다.
죽을 수는 있어도 오랑캐에게는 굴복하지 않겠노라.

이승칠 선생은 1850년 내북면에서 태어나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의 집안이었다. 선생은 주부로 송라찰방을 역임하고 1886년 나이 37세에 감찰에 승진했다. 이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당시 나이 61세에 자결을 시도하나 가족들에 의해 실패하고 이후 1912년 일본 명치가 세상을 떠나자 상복을 강요하자 상복을 입기를 거부하고 63세에 자결하게 된다.
이런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렬히 순절한 이승칠 선생의 뜻을 후대에 기리 남기기 위해 청벽산 도로 인근에 1959년 3월1일 ‘이의사승칠공항왜의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 봉황리에는 농작물 고추에 대한 특별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1960년대 잎담배의 재배방식이었던 비닐멀칭을 사용하면서 봉황리에서는 고추재배를 위해 멀칭을 처음 시작한 마을로 유명하다. 봉황리의 마을 주민이 고추에 멀칭을 사용해 품질이 아주 우수하고 모양이 크고 빛깔이 좋은 고추를 생산했던 마을이기도 하다. 1981년 봉황리의 고추 재배면적은 23ha에서 41톤을 생산해 1평에 1근을 생산하는 당시로써는 놀랄만한 소득작물이어다고 한다.
달천을 감싸안고 있는 내북면 봉황리는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달천을 가로지르는 봉황교를 건너야 한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달천에 나와 미역을 감던 어린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마을이다.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며 물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삼삼오오 철엽으로 무더운 여름을 식힐 수 있는 지형을 지녔기에 봉황리는 천혜의 명당 마을이다.

이식리에서 봉황리로 흐르는 달천.
이식리에서 봉황리로 흐르는 달천.
절터가 자리했던 절터거리.
절터가 자리했던 절터거리.
봉황리 입구에서 바라본 청벽산 전경.
봉황리 입구에서 바라본 청벽산 전경.
이승칠 지사 공적비.
이승칠 지사 공적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