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모정 김태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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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모정 김태환 선생님
  • 김옥란
  • 승인 2021.06.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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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茅亭) 김태환(金太煥) 선생은 조선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모재 김안국 선생의 16대 후손이다. <한국의 명문가> 의성 김씨 종갓집 종손인 모정 선생께서는 청렴하셨다. 속리산 산속에서 홍익인간 이념으로 이타적인 삶을 사시면서, 서도(書道)에 깊으셨고, 서각(書刻)과 독서를 하셨다. 날마다 마당을 빗자루로 쓰시면서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를 살포시 미소띤 얼굴로 읊으셨다.

공무원이던 선생은 친구분들과 속리산 여행을 하셨다. 그 여행은 선생의 예술적인 심미안을 움직여 선생을 속리산으로 불러들였다. 선생은 고향 땅을 팔아 기념품 사업을 크게 시작했다. 타지에서 경험 없이 시작한 사업에는 실패라는 호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속리산은 그 일을 통하여 선생을 산골 표고버섯 재배 움막으로 불러들였다.
곧바로 선생은 집 이름을 <비로산장>이라고 지어 붓글씨로 써서 나무에 서각하여 내걸었다. 그것은 비로자나 부처님과 비로봉을 생각하는 의미였고, ‘비로’가 빛, 광명(光明)을 의미하므로 희망적인 미래가 있는 밝고 환한 ‘빛의 집’이라는 의미였다. 이때 선생은 비로산장 시작 기념으로 <가문비나무 묘목 두 그루>도 마당에 심었다. 가문비나무는 한국에는 흔치 않은 수종이다. 독일 나무인데, 외국에서는 이 나무로 바이올린을 만든다. 이름짓기와 나무심기는 모정 선생 부부의 소원을 담은 소박하지만 엄숙한 출범식이었다.

선생 부부는 평생 지극한 불심으로 부처님을 받들며, 산을 돌보고 사람들을 돌보셨다. 자연을 지키고 사람들을 지키는 인자한 삶이었다. 항구로 돌아오는 배들을 위하여 밤바다에 불 밝히는 외딴 섬 등대지기. 모정 선생 부부는 속리산 금강골이라는 아름다운 외딴 섬의 비로산장이라는 등대에서 자비의 불빛을 밝히는 등대지기로 사셨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 무사히 자신의 종착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역사에 식견이 높았던 모정 선생은 산장을 찾아오는 명망가들과 붓글씨를 써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정신적 유희를 즐기셨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쓰기를 좋아하셨고, 믿음으로 정성껏 쓴 이 붓글씨들로 스님들의 불사에 보탬이 되고자 하셨다. 새해가 되면 정재계 인사들과 학자들이 붓글씨 받으려고 선생을 찾아와 큰절을 올리곤 했다. 모정 선생은 그들에게 사훈, 가훈, 원하는 글씨들을 써주셨다. 그들이 봉투를 내놓으면 “나는 글씨 장사하는 사람 아니오.”라며 보내셨다. 사람들이 글을 써달라고 찾아오면 늘 흔쾌히 써 주셨다. 이런 선생을 사람들은 “모정 선생님은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야.”라고 우러르곤 했다.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모정 김태환 선생님이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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