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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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색깔
  • 양승윤 (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1.06.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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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급한 날씨로 다시 찾아 온 여름을 맞아 감나무 연두색 잎이 초록으로 변해 가는 작은 마당이 있다. 꽃이 떨어지고 애기 손톱만한 감이 매달려서 먹게 될 때까지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올 여름이 아무리 덥더라도 어떻게 지나가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감닢은 곧 진초록으로 변할테고 탱자알만 열매는 점차로 감 모양을 잡아갈 것이니까.
   색깔은 그 무엇보다도 변화무쌍하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구별할 수 있는 약 500만 가지의 색상(色相)이 존재한다고 하니 놀랍다. 또한 색깔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뇌)로 본다는 사실이다. 같은 사물이라도 제때 식사한 사람과 몇 끼를 굶은 사람이 보는 것이 같지 않음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늘 보고 느끼는 자연경관은 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아름답게 바뀐다. 색깔도 유화처럼 강하지 않고, 수채화처럼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상하(常夏)의 나라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모든 색깔이 매우 진하고 강열함을 알 수 있다. 우선 모든 수목이 일 년 내내 진초록이다. 석양은 핏빛처럼 검붉고, 식용유 역할을 하는 야자 속살은 눈처럼 하얗다. 음료수 색깔도 모두 원색(原色)이다. 망고 주스처럼 진한 노랑색이 있는가 하면, 전 세계 180개국에서 팔리고 있는 과일향 음료인 환타가 이 나라에서는 빨간색이거나 진한 보라색이다. 지난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 탄광촌에서 광부들이 대규모 파업을 벌였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현지 르포기사를 실은 한 신문은 사북의 아이들은 풍경화를 그리면서 시냇물을 검정색으로 칠한다고 썼다.   
  뇌로 보는 색깔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태양 광선이다. 이 태양 광선은 굴절(屈折)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나타낸다. ‘빨주노초파남보’로 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무지개 색깔이 그것이며, 이를 이용한 광학기구가 다양한 형태의 프리즘이다. 그래서 지구 위도(緯度)에 따라 그 지역에서 보고 느끼는 색깔은 다른 위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보인다.  
  인도의 카스트(Caste)제도는 사성제도(四姓制度)를 바탕으로 하는 극단적인 세습적 신분제도이다. 인도에서는 이를 바르나(Varna)라 칭하는데, 바르나는 다름 아닌 ‘색깔’이라는 뜻이다. 바르나의 최상위 계급은 브라만(婆羅門)이라 칭하는 승려 계층이다. 아직 신분제도가 단순하고 직업이 다양화되기 이전인 고대 바르나 사회에서 이들 승려 계층은 희생을 상징하는 오렌지 색깔의 옷을 입었다. 이것이 오늘날 남방불교문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색 승복(僧服)의 기원이다. 브라만 다음으로 왕족이나 무인들이 크사트리야(刹帝利) 계층을 형성하였으며, 그 아래 평민 계층인 바이샤(吠舍)와 노예 계층인 수드라(首陀羅)가 있어서 고대 왕조는 계층별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게 하였다.  
  고대 인도에서 신분을 구분하던 바르나가 동남아의 인도문화권에서는 단순한 색깔을 의미하는 단어인 와르나(warna)로 정착되었다. 고유명사가 보통명사화한 것인데, 이런 예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많이 발견된다. 문화의 발전적 전이(轉移)에는 언제나 문화어휘가 앞장섰다. 색깔로 사회계급을 구분하던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동남아로 소개되면서, 제도는 적응하지 못하였으나 제도를 뜻하는 어휘는 원형대로 남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종교문화는 색깔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한 예로 불교에서 빨강은 탄생을 의미한다. 북방불교의 큰 갈래를 이룬 중국대륙 사람들이 빨간 색깔을 선호하는 까닭은 탄생에서 번영으로, 다시 정열과 행운을 상징하는 의미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한국을 방문한 중국 관광객들은 거리를 메운 ‘붉은 악마’의 거대한 함성에 깜짝 놀랐다. 이들은 1960년대 후반 중국대륙을 휩쓴 문화대혁명 전위세력이었던 홍위병의 붉은 파도는 붉은 악마에 비하면 ‘잔잔한 물결’이었다고 표현했다.
   진녹색의 여름이 마당 끝 감나무 고목을 에워싸고 있다. 그 아래 세워둔 흔들이 의자에 아내와 둘이 앉아 봄여름가을 색깔을 모두 가진 감잎 단풍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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