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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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쟁이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21.05.0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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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동안 머문 그곳 교민사회에는 ‘풍쟁이’라고 놀림 받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연스럽게 그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몇마디 이야기가 오갔을 무렵에 그는 고국에서 누구에게 800억원을 빌려주었다가 떼이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30여년전 그때는 1억도 큰 재산이었다. 그런데 800억원씩이나 남에게 떼여? 과장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시냐?” 면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자기가 고국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고 내가 그 액수에 놀랐을 것이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 후 만남이 잦아지면서 그의 풍도 조금씩 심해져 갔다. 그 후 말이 없는 점잖은 교민 한분과 만나서, 800억원을 떼이고 화가나서 이곳으로 이민온 분이 있더라고 말했다. 내 말을 듣자 그는 대번에 누구아니더냐? 라고 말하면서 딱하다는 듯, “그 사람은 왜 자꾸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미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 있는듯 했다. 내가 거기서 1년 넘게 생활을 하면서 800억이라는 숫자는 까맣게 잊어버린채 그와 만났는데 그것은 나에게 자주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그가 싫지는 않았다. 그의 ‘풍’은 악의가 없었고 그저 재미있게 들리는 ‘오락풍’ 정도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큰돈을 사기당해서 안됐다는 식으로 위로해 주니 그도 좋아하는 것이었다. 특히 여러 가지 사유로 고국에서 살지 못해서 해외로 떠나온 교민들은 해외생활에 크게 우쭐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국에서의 생활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화려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마지못해 나와서 이렇게 살고 있다는 식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 사는 교민들 대부분은 처음에 ‘병아리 감별사’로 나왔었는데 내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거의 모두가 ‘침쟁이’로 직업을 바꾼 상태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런 기술도 없어서 놀고 있는 상태라서 앉아서 허풍이라도 떨지 않으면 심심해서 못살 지경인 듯 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남들이 ‘또랑이’라고 뒤에서 비웃음을 사는 것도 딱하고, 내가 모른척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것도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내심의 고민을 정리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그에게 다른 질문을 해봤다. 고국에서 사업할 때 규모가 어땠으며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봤느냐? 고. 그는 순간, 가만이 있더니 곧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바깥 ‘풍’을 빨아들이고 토해낼 기세를 보였다. 내가 “마음도 안좋을 텐데 그 이야기는 됐다”고 만류하면서 화제를 바꾸자 그도 바로 따라왔다. 그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였다. “됐다”라는 반응에서 창피함을 느꼈는지 그 후부터는 조금씩 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단순히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서 일깨워 줄 필요성이 있었다.
흔히 ‘풍쟁이’들이 풍을 떠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과시 행위의 일종이다. 요즘 “이제 만나러 갑니다” 라고 하는 인기방송 프로에서 탈북자들이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탈북한 사연을 들으면서 김일성 일가의 세습독재왕조체제에 대한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일면, 그들 중 일부가 북한에서 최고 1% 귀족토대 집안으로 아주 잘 살았다는 이야기 부분에서는 위에서 말한 그 풍쟁이같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다. ‘새터민’이 자유세계에 정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북한에 있을 때 화려한 회상으로 덮으려 하지는 않을까? 좌우간, 해외생활 중에 본 그 ‘풍씨’의 모습은 딱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풍도 한창 젊은 혈기와 함께 했을 때 빛을 발하지, 나이가 들면 그 짓도 못하는 법이다. 지금쯤은 내가 살던 그곳의 ‘풍씨’도 풍선바람이 많이 빠져 쭈그러들었을 것이다. 풍도 한창 젊을 때 이야기지 나이가 들면 ‘노망풍’을 낼 힘도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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