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의 날’에 부쳐
상태바
‘새마을의 날’에 부쳐
  • 보은신문
  • 승인 2021.04.22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84>

 70년대, 그러니까 지금의 노인들이 이 삼 사십대 젊음을 과시하던 시절, 새벽녘엔 도농 구분 없이 동네 확성기에선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란 새마을운동 노래가 마을에 울려 퍼졌다.

 그러면 싫든 좋든 주민마다 빗자루나 그 외 도구를 들고 나와 이곳저곳 동네 청소를 했다. 지금도 고리타분 성향의 노인들 대부분은 새마을운동이 보릿고개를 없앴고, 농촌발전을 도모했다며 철석같이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를 인정한다.

 1969년 8월, 영남지역 수해복구현장에 가던 박 대통령을 태운 특별열차가 도중 경북 청도군 한 마을 어귀에 정거했다. 철도변의 울창한 산림, 그 옆 양철과 슬레이트로 말끔히 개량된 지붕의 농가, 잘 닦인 마을진입로 등등은 그가 꿈꾸던 탈바꿈된 농촌모습이었다.

 그는 늘 자신을 농민의 아들로 이미지화했다. 선거 때마다 ‘빈농출신’ ‘역경을 딛고 선 대통령’을 내세웠다. 모내기철이나 추수 때는 들판바닥에 주저앉아 농민들과 소탈하게 막걸리 곁들인 새참 먹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선거구호에는 늘 ‘황소’가 등장했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 젊은이들은 가발, 봉제, 전자 등 산업화의 역군이 되고자 도시로 떠났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갈수록 벌어졌다. 농촌 지지를 표밭으로 정권을 유지했던 그와 공화당은 어떻게든 농민의 불만을 해소해야만 했다.

 1970년4월 그는 새마을운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발표했다. 허나 별 효과가 없었다. ‘농촌 현대화’를 내세웠지만 아무런 뒷받침을 해주지 못했다. 물자지원은커녕 흥을 북돋울 소재도 마땅치 않았다. 농민들은 ‘뭔 소리냐’며 시큰둥했다.

 그때, 공화당 재정위원장이자 쌍용양회 회장이기도 했던 성곡 김성곤이 제안을 했다. 시멘트 생산량이 너무 많아 재고처리 때문에 골치가 아프니 정부 돈으로 융자를 좀 해주면 몽땅 넘기겠다는 것. 결과 당시 돈 30억 원의 시멘트 1천만 포대가 농촌에 무상 배포하게 됐다.

 1963년 대선에는 ‘밀가루’, 1967년 대선 때는 ‘막걸리’, 3선 개헌 후 1971년 대선을 앞두고는 전국 3만5천개 마을에 각각 300포대씩 ‘시멘트’를 무상 배포했다. 당시 박경원 내무장관은 후일 ‘사실 새마을운동은 시멘트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한다’고 회고했다.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물들이 쏟아졌다. 1만6천개 마을에 시멘트로 단장된 공동빨래터가 만들어졌다. 큰비만 오면 사라지던 마을주변 허술했던 다리가 튼튼한 교량으로 건설됐다. 주민들은 새마을운동 덕에 날로 변신하는 농촌마을을 보며 흥이 났었다.

 오늘날은 코로나19를 막는 굳건한 방역만이 이 시대 색다른 새마을운동이 될 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