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고팠던 시절을 우리는 너무 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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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고팠던 시절을 우리는 너무 잊고 산다
  • 양승윤 (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1.04.15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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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직 후 5년간 강의를 더 할 수 있는 모교의 시혜가 주어졌다. 일찍이 고향 보은으로 낙향한 터여서 강의가 있는 날은 서울로 통근을 했다. 새벽 첫 버스를 타면 7시 가까이에 대전역에 닿는다. 서울역 도착 목표를 10 시로 잡고 무궁화호를 예매하고 나면, 탑승 시간까지 50분의 여유가 생긴다. 역 앞 해장국집에 다녀올 시간이다. 선지해장국, 콩나물해장국, 콩나물비빔밥 등 세 가지 메뉴가 전부 4천 원씩인 허름한 식당이다.
   이곳에 들릴 때마다 선지해장국을 주문한다. 선지가 두어 덩어리 들어 있는 값싼 우거지 해장국이다. 밥이 한 그릇 따라 나오고, 반찬은 언제나 변함없이 세 가지다. 김치 조금, 깍두기 예닐곱 개, 그리고 어묵볶음이 두어 젓가락이다. 사시사철 밥그릇이 따뜻하다. 새벽에 찾아오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꽉꽉 눌러서 퍼 담은 것 같다. 요즘 어디서도 보기 힘든 ‘꽉’ 담은 더운밥이다. 밥그릇을 감싸면 따뜻한 온기가 두 손을 거쳐 온몸으로 전해진다.
   새벽 손님은 거의 전부가 혼자다. 꽁꽁 언 역전 노숙자가 잔뜩 웅크린 채 들어오고, 밤새 산지에서 야채를 싣고 대전으로 장거리를 운행하여 피곤과 허기가 역력한 운전기사도 온다. 밤새도록 술 마시고 해장술 한 잔 더 하러 들른 술꾼도 더러 있다. 술은 소주와 막걸리가 있는데, 술값만은 선금으로 받는다. 취객들과 술값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취기가 많이 남아서 주방 쪽에 대고 큰 소리를 내는 손님도 간혹 봤지만, 대개는 앞만 보고 조용하게 식사를 하고 나간다.
   쌀이 남아도는 세상이라 그런지 밥이 중한지 도무지 모르는 세태(世態)다. 학식(학생식당) 밥은 맛있다. 설렁설렁하게 퍼 담고 그것도 반 그릇씩이다. 그래도 깨끗하게 비우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반반인 것 같다. 옛날과 달리 요즘 학생들은 어디서든 잘들 먹기 때문일 것이다. 퇴직 후에는 주로 학식을 이용했는데, ‘꼭’ 조교들을 앞세워 같이 갔다. 밥 표 사고 줄 서는 것도 그렇고, 머리 ‘허연’ 노인네가 젊은이들 틈을 비집고 앉아 고개 숙인 채 혼자 먹는 것도 좀 그래서다. 즐겨 먹던 ‘떡라면에 공깃밥’이 아직도 2천3백 원이다. 만 원이면 조교 세 명을 데려가도 된다.
   대전역 앞에서 가끔 만나는 따뜻하고 꽉 찬 밥이 그렇게 반갑다. 긴 세월 배고픔의 기억 때문이다. 교직에 계셨던 선친의 수입으로는 자식 8남매를 거느리고 요절한 삼촌이 남긴 사촌 5남매를 건사하기에 너무도 역부족이셨다. 맛있는 밥과 맛깔스러운 반찬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영 떠오르지 않는다. 선친께서 즐겨 드셨던 식초 간장으로 대강 간을 맞춘 삶은 대파 정도가 생각난다. 어머니가 어렵사리 담아 주시는 밥그릇에 토 달지 않고 얼른 비우고 얼른 밥상에서 물러나는 것이 당시의 식사 매너였다.
   안식구는 때때로 소녀 시절의 맛을 그리워한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배고팠던 옛날을 회상하며 감상에 젖는 것도, 조미료를 잔뜩 친 느끼한 해장국을 맛있게 잘 먹는 것도 싫어한다. 밋밋한 연애를 햇수를 헤아리면 8년 만에 장가를 들었다. 연애 시절에 ‘하얀 쌀밥과 맛있는 김치’를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대화 중에 그 얘기가 가끔 나온다. 안식구는 언제나 따뜻한 밥과 맛깔스러운 김치와 한두 가지 정갈한 반찬을 상에 올린다. 초임 교수 때부터 16년간이나 보온 도시락을 싸줬다. 시집 장가간 세 자식들에게 쌀과 김치는 힘자랄 때까지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물어보나마나 그 약속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성전 스님의 말씀 중에 밥의 의미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뜻한 바를 완성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모자란 것을 채우고 주변을 이롭게 하려고 밥을 먹는 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했다. 밥은 소중한 것이다. 밥 먹기가 어려웠던 시절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밥을 나누어야 할 아픈 이웃이 혹시 있는지 어쩐지 늘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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