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암이 세조로부터 정이품의 품계를 받은 소나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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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이 세조로부터 정이품의 품계를 받은 소나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 보은신문
  • 승인 2020.12.1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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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충암 김정선생 500주기 기념 9편

본지는 우리지역 출신으로 기묘명현 중 한 분인 충암 김정선생(1486~1521년) 500주기를 맞아 그를 조명하는 기획물을 준비했습니다. 기획 취지에 동의해준 김병서 필자께 지면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필자가 소개하는 국역 충암집 내용을 가감 없이 독자들께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글이지만 500년 전 귀향지 제주에서 절명한 보은 출신 충암 김정 선생의 삶을 반추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는 필자의 말을 독자들께 드리는 인사로 대신 전해 드립니다. 본보의 취지에 동감하는 독자들의 성원과 투고를 통한 많은 참여가 있길 기대합니다. -편집부-

14.소나무

野松(야송)

時來可作明堂棟 / 事否先歸爨下柴 (시래가작명당동 / 사부선귀찬하시)

不託窮崖老霜雪 / 慚羞樗櫟共成灰 (불탁궁애노상설 / 참수저력공성회)

때가 되면 명당의 기둥이 도리 수 있으나 / 일이 막히면 먼저 불쏘시래로 되어 버리네

궁벽한 벼랑에 기탁하여 서리와 눈에 늙지 않으면 / 상수리 나무와 함께 재가 되는 것이 부끄럽다네 *국역 충암집 상권 454~456쪽

서문(小叙)을 통해 시를 쓰게 된 과정을 상세히 서술해 놓은 글이다.

속리산 가는 길가 들판에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 중 일부를 나무꾼들이 베어 간 것을 보고 동행한 지인(안사의)과 나눈 대화를 간략히 하여 절구 한 수 읊었다고 한다.

도끼질에 동량으로 사용 못하고 뗄 감으로 베어지는 소나무들을 보고 깊은 골짜기에서 서리와 눈 맞고 자라는 소나무는 큰 재목으로 자라서 동량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가까운 들판에 있는 소나무는 뗄 감이 되어 결국엔 재가 될 것이라는 뜻을 가진 글이다.

동행한 안사의가 누군 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속리산을 읊은 “사의의 시(士毅詩)”가 부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유배지인 제주로 가던 중 지은 憩道傍老松下(게도방노송하)와 함께 음미해 보면 더 큰 감회를 느낄 수 있다.

至海南至海涯, 憩道傍老松下, 吟三絶

(지해남지해애, 게도방노송하, 음삼절)

이 시는 기묘사화를 겪은 뒤 귀양지 제주로 가는 길에 해남의 바닷가 길가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지은 것으로, 원주용의 “조선시대 한 시 읽기(상,하)”에도 소개되어 있는(2,3절) 충암을 대표하는 글들 중 하나로 꼽히는 있는 걸작이다.

一(일)

欲庇炎鄕暍死民 / 遠辭岩壑屈長身 (욕비염향갈사민 / 원사암학굴장신)

斤斧日尋商火煮 / 知功如政亦無人 (근부일심상화자 / 지공여정역무인)

찌는 듯 한 더위에 죽어가는 사람 보호해주려고 / 먼 산골짜기 마다하고 긴 몸 휘어진 채 있구나

날마다 도끼질하며 행상 땔감용으로나 찾게 하니 / 진시황같이 그대의 공을 아는 이도 드물 것이라 *국역 충암집 하권 96~97쪽

1절을 국역 충암집의 해석과 약간 다른 시각으로 분석한 글들을 보고 한문만 충암집에 충실했다.

국역 충암집에는 기구에 향(鄕)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자료에는 정(程)으로 되어있다.

특히 결구 “知功如政亦無人(지공여정역무인)”에 있는 “정(政)”을 국역 충암집은 “정치”라고 해석했으나 대부분이 “정(政)”을 진시황이라고 해석하고 그 근거를 진시황의 이름인 “정(政)”에서 찾고 있다.

진시황이 태산에서 갑자기 만난 비를 피하게 해 준 소나무에게 오대부란 벼슬을 내려 감사를 표했으니 충분한 근거를 가진 합리적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사마천의 사기 시황제본기)

그런데 충암의 이름도 “정(淨)”인데 혹시 자신의 이름과 동일한 음을 가진 “정(政)”을 빌려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라는 나름의 생각에 이르니 더 아프게 다가오는 구절이다.

그저 생각만 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깝다.

二(이)

海風吹去悲聲遠 / 山月高來瘦影疏 (해풍취거비성원 / 산월고래수영소)

賴有直根泉下到 / 雪霜標格未全除 (뇌유직근천하도 / 설상표격미전제)

바닷바람 불어 가니 슬픈 소리 멀리 퍼지고 / 산 달 높이 뜨자 파리한 그림자 성기구나

곧은 뿌리 샘 아래까지 있음에 힘입어 / 눈서리 모르는 품격 전부 없어지지 않았네 *국역 충암집 하권 96~97쪽

三(삼)

枝條摧折葉鬖髿 / 斤斧餘身欲臥沙 (지조최절엽삼사 / 근부여신욕와사)

望絶棟樑嗟己矣 / 楂牙堪作海仙槎 (망절동량차기의 / 사아감작해선사)

가지는 꺾이고 잎은 헝클어져 내려와 / 도끼에 찍히고 남은 몸은 모래 위에 쓰러질 듯하네

기둥이 되기 바람은 사라져 자신을 한탄하나 / 비쭉이 나온 가지는 바다 신선의 뗏목이 될 만하구나 *국역 충암집 하권 97쪽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안쓰러운 처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글로 소나무에 자신을 형상화 시켜 놓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2절 기구에서의 청각적 이미지인 “슬픈 소리(悲聲)”는 승구에서 시각적 효과가 드러나는 “파리한 그림자(瘦影)”로 변환시켜 공감각적 효과를 가미한 매우 격조 높은 문장이다.

도끼는 현실 정치의 시련을 나타내는 의미를 함축시킨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정치적 시련으로 유배 길에 나선 초라하고 슬픈 모습을 한탄하며 나라의 동량으로 쓰여 지 길 원한 자신의 뜻은 사라졌지만 선비로서의 곧은 기개가 남아 있음을 드러내고 있어 번역본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처지와 마음을 충분히 엿 볼 수 있는 글이다.

顯德王后 挽章(현덕왕후의 만장)

陵谷人間事易非 / 幾番華柱泣令威 (능곡인간사역비 / 기번화주읍령위)

攀追顯廟臣民恨 / 風雨昭陵草樹悲 (반추현묘신민한 / 풍우소릉초수비)

一體寢宮重煥爀 / 九泉松柏得歸依 (일체침궁중환혁 / 구천송백득귀의)

公山杯土年年事 / 熊虎依然鎭翠微 (공산배토년년사 / 웅호의연진취미)

능침과 세상은 일이 다르고 / 몇 개의 화려한 기둥은 눈물에도 위엄있네

현묘를 추앙함은 신민의 한이요 / 비바람 치는 소릉은 초목도 슬프구나

한몸의 능침이라 거듭 빛나니 / 구천의 송백도 귀의할 수 있으리

빈 산의 흑을 복돋움은 해마다의 일일지니 / 곰과 호랑이가 아직도 흐릿한 기운을 누르고 있구나 *국역 충암집 상권 257쪽

속리산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목에 있는 정이품 소나무에 대해 단 하나의 글도 남기지 않은 이유를 헤아려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현덕왕후(顯德王后)는 조선조 6대 임금인 단종의 생모로 “소릉(昭陵)”은 안산에 있었던 그의 능을 말하며 “현묘(顯廟)”는 단종의 부친인 문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종 복위운동” 실패의 여파로 1457년 서인으로 격하되었던 현덕왕후가 1513년에 이르러서야 왕후로서 복위되어 문종이 묻혀있는 현릉으로 이장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성 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1453년) 조카인 단종으로 부터 왕위를 빼앗고, 1457년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슬픔 역사가 당시로서는 오래된 과거가 아닌 현대사의 아픈 상처였을 것이다.

절개를 외치던 많은 지식인들 처럼 충암도 정당성이 결여된 폭력에 의거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결국엔 조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충암은 “현덕왕후의 만장”을 계유년(1513년) 사월에 쓰고 그 해 가을 속리산에 갔다고 한다.(오희상의 충암선생 연보)

속리산 길가의 소나무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시를 지어 읊었던 충암이 세조로부터 정이품의 품계를 받은 소나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속리산 가는 길에 있는 정이품 소나무를 피할 순 없었지만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 분명하다.

(다음호에 이어짐)
/김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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