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의 장자허에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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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의 장자허에서 놀다’
  • 보은신문
  • 승인 2020.11.2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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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 김정선생 500주기 기획물

본지는 우리지역 출신으로 기묘명현 중 한 분인 충암 김정선생(1486~1521년) 500주기를 맞아 그를 조명하는 기획물을 준비했다. 기획 취지에 동의해준 김병서 필자께 지면으로 감사 인사를 드린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필자가 소개하는 국역 충암집 내용을 가감 없이 독자들께 알려 드리도록 하겠다. 모자라고 부족한 글이지만 500년 전 귀향지 제주에서 절명한 보은 출신 충암 김정 선생의 삶을 반추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는 필자의 말을 독자들께 드리는 그의 인사로 대신 전해 드린다. 본보의 취지에 동감하는 독자들의 성원과 투고를 통한 많은 참여가 있길 기대한다. 12번째 순서 -편집부-
 

고향 종곡에서 가까운 속리산은 충암집에 자주 등장한다. 벗들과 함께 또는 가까운 지인과 동행했고 길가의 소나무 하나라도 쉽게 외면 못하고 글로 남겨 두었다. 칠유암, 도솔암, 종침동, 소요사(대암사) 등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속리산 구석구석에 그의 흔적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속리산에 관련된 글은 고향의 풍광을 기록해 둔 것으로 지역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국역 충암집 내용을 가급적 그대로 싣고자 한다. 성지와 더불어 속리산의 장자허에서 놀다. 계유년에

(與成之遊俗離山長者墟)

古址空山下 / 相傳長者居 (고지공산하 / 상전장자거)

亭臺已無處 / 砌礎尙能餘 (정대이무처 / 체초상능여)

當日千年業 / 如今一廢墟 (당일천년업 / 여금일폐허)

臨岐歎浮世 / 山水助欷歔 (임기탄부세 / 산수조희허)

텅빈 산 아래 옛 터가 있는데 / 덕이 있는 어른이 살던 곳이라네

정자와 누대는 이미 간곳이 없으나 / 섬돌과 주춧돌은 아직 남아 있구나

당시에는 천년을 내려오던 곳이 / 지금은 폐허가 되었구나

갈림길에 서서 뜬구름 같은 세상을 탄식하니 / 산과 물도 이 탄식을 거들어 주고 있구나 *국역 충암집 상권 250~251쪽

계유년(1513년)에 지은 글로 동행한 성지는 김극성(1474~1540년)의 호로 충암과는 아주 돈독한 우정을 나눈 사이로 보이는데 후에 우의정에 오른 사람이다.

산 아래 옛 터는 어디이며 그 곳에 거처했던 사람은 누구를 말 하는지 알 길이 없어 매우 아쉽다.

인생을 뜬 구름을 뜻 하는 부(浮)로 생각하는 충암의 모습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변함이 없다.

俗離途中作(속리산에 가는 길에 지음)

夕陽沒西峯 / 寄彩在東嶺 (석양몰서봉 / 기채재동령)

參差高與低 / 巧分靑紫影 (삼차고여저 / 교분청자영)

風生洞雲暝 / 露沐巖樹淨 (풍생동운명 / 로목암수정)

百態各呈媚 / 遠近互掩映 (백태각정미 / 원근호엄영)

世人眼俱肉 / 眞畵誰能省 (세인안구육 / 진화수능성)

我亦無妙思 / 多慙鴈奇勝 (아역무묘사 / 다참안기승)

석양이 서쪽 봉우리에 지니 / 기이한 광채 동쪽 산마루에 있네

울쑥불쑥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니 / 교묘하게 푸르고 검붉은 그림자를 나누었네

바람이 일어나니 골짝의 구름은 어두워지고 / 이슬이 씻어낸 바위와 나무는 깨끗하구나

온갖 모양으로 제각각 아름다움을 드러내니 / 원근이 서로 막고 가려 그늘지게 하네

세상 사람들은 눈이 모두 고기덩어리이니 / 진정한 그림을 누구라서 알아볼까?

나 또한 오묘한 생각이 없으니 / 기러기의 기묘한 경치에 무척 부끄럽구나 *국역 충암집 상권 444~445쪽

속리산의 풍광을 이렇게 멋스럽게 읊은 한시는 처음 접해 보았는데 우리말 시어로 조금 더 다듬어 놓으면 속리산을 대표할 수 있는 글이 될 것 같다.

“이슬이 씻어낸 바위와 나무는 깨끗하구나 - 露沐巖樹淨(로목암수정)”와 “온갖 모양으로 제각각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 百態各呈媚(백태각정미)”는 간결하지만 속리(俗離)라는 이름의 뜻과 산(山)의 멋 진 풍경을 함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

저녁 무렵의 속리산 풍광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 한 시각적 표현들이 돋보이는 글로 속리산의 아름다움을 말 하고 있다.

국역 충암집은 世人眼俱肉(세인안구육)을 “세상 사람들은 눈이 모두 고기 덩어리이니”라고 번역했는데, “속세에 찌든 세상 사람들의 눈”이 라 해석한 것이 더 적합한 말이라 생각한다.

多慙鴈奇勝(다참안기승) 구절의 기러기鴈(안)자가 원문엔 寫(사)로 기재되어 있고 그래야 전체적 문맥상 적합하다며 “부끄럽도다. 이 기이한 풍경을 베낄 뿐이니...”로 해석해 놓은 의견이 있다.

한 번쯤 원본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贈義僧信玄(의로운 스님 신현에게)

信玄學浮屠 / 不殺爲服膺 (신현학부도 / 부살위복응)

除害以安人 / 通變眞上乘 (제해이안인 / 통변진상승)

憐爾蔬荀姿 / 骨氣如秋鷹 (연이소순자 / 골기여추응)

三軍有髥婦 / 怯賊誰先登 (삼군유염부 / 겁적수선등)

慙汝飢瘦力 / 縛之如擒蠅 (참여기수력 / 박지여금승)

散盡百金賞 / 拂衣雲山層 (산진백금상 / 불의운산층)

抗跡托冥鴻 / 擧世誰能矰 (항적탁명홍 / 거세수능증)

援筆再三歎 / 足令衰懦興 (원필재삼탄 / 족령쇠유흥)

신현은 불교를 배워 / 죽이지 않는 것을 명심했다네

해로움을 제거해 사람을 편하게 하고 / 변화에 달통하니 정말 최고 경지로다

불쌍하게도 나물과 풀을 먹은 모습만 / 골의 기운은 가을 매 같다

삼군은 수염 달린 아낙네만 있어 / 도적에 겁먹어 먼저 나서는 자가 누구랴?

주리고 여윈 너의 힘이 부끄럽게도 / 도적을 묶을 때는 파리를 사로잡는 듯하다

백금에 이르는 상금을 다 나누어주고 / 옷을 털고 구름에 쌓인 산으로 갔네

높은 발자취는 저 하늘 기러기에 맡기니 / 세상의 누가 활을 쏘아 잡으리?

붓을 들어 두 번 세 번 탄식하니 / 겁많은 이에게 교훈이 되기에 족하리 *국역 충암집 상권 445~446쪽

무진년(1508년)에 속리산의 두 길에 근거를 두고 있던 큰 도적들을잡기 위한 계책을 세우고 그 우두머리를 체포한 스님 신현을 의로운 스님이라 이름 지었다는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자신의 고향 지역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 도적들을 소탕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받은 상금까지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글로 남긴 것 같다.

겁만 먹고 있으며 도적들을 소탕 하 지 못하고 있는 군대의 나약함을 수염달린 여자를 뜻하는 염부(髥婦)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16C 초반에 속리산을 근저지로 한, 군대가 두려워할 정도의 규모를 가진 도적떼가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고 신현은 어떤 스님 이였을까?

정말 궁금하다.

“가을의 흥취,10수(秋興十首)” 중 7절에 속리산 주변 지역의 경치를 자랑한 글이 있다.

茲邦山水窟 / 俗離鎭崢嶸 (자방산수굴 / 속리진쟁영)

厚地壓疑裂 / 高天撑不傾 (후지압의열 / 고천탱불경)

期尋壺裏境 / 逃得世間名 (기심호이경 / 도득세간명)

寄謝延明府 / 無爲宦務縈 (기사연명부 / 무위환무영)

이 곳은 산수가 수려한 곳으로 / 속리산이 주산으로 우뚝 솟았다

땅이 두터워 눌리다 터질 듯하고 / 높은 하늘을 지탱해도 기울지 않네

신선의 경지 찾기를 기약하나니 / 세속의 명성에서 달아나리라

연 영감에게 부치며 당부하나니 / 벼슬의 직무에 얽매이지 마시오 *국역 충암집 상권 143쪽

원문에 “병들어 지어서 연몽여 영감에게 보내고, 아울러 안정 신덕우에게 서찰을 보낸다”는 설명이 기재되어 있다.

연몽여는 충암과 함께 1507년 과거에 급제한 연구령으로 고향집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던 중 보은 현감으로 있는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며 고향의 아름다운 경치를 은근히 자랑한 것으로 보인다.

연몽여와 신덕우는 각각 10수씩 답 글을 보냈는데 특히 연몽여가 보낸 시의 대부분이 속리산 곳곳을 노래한 글로 되어 있어 보은현감으로 있는 특수한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국역 충암집 상권 146~155쪽. (다음호에 이어짐)

/김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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