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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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죽음을 위하여
  • 최동철
  • 승인 2020.11.2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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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한 요양시설에서 84세의 노인이 임종했다는 소식이다. 오랜 기간 전립선암과 당뇨병을 앓아왔단다. 치료가 아닌 완화처방 때문인지 통증을 호소하지는 않았단다. 한 명의 자식이 있다고 알려졌으나 기십 여 년 전부터 연락이 단절됐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무연고 노인이다. 체격이 우람했던 고인은 낙상으로 와상상태가 되기 전 까지는 가끔 타령조의 갖은 노래를 혼잣말로 읊조려 우울한 좌중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했단다. “착하게 사셨으니 좋은 곳으로 가실거다”고 귓속말하자 눈물을 흘렸고 잠시 후 임종했단다.

 외롭기는 했겠지만 좋은 죽음이라 할 수 있다. ‘맞이하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당하는 죽음’은 나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코로나19 바이러스감염증으로 인해 최근까지 죽음을 당한 5백여 명의 사망자는 불행한 나쁜 죽음이라 할만하다.

 물론 좋고 나쁜 죽음의 의미는 반대개념이 아니다. 다만 죽음의 질을 놓고 보았을 때 철학적 사회적으로 모호한 개념의 분별일 뿐이다. 일테면 통증 없이 숨을 거두는 자연사는 좋은 죽음이다. 교통사고, 돌연사고사, 병사, 자살, 피살 같은 경우는 나쁜 죽음의 형태일 것이다.

 모든 이들은 좋은 죽음을 갈망한다. 대부분이 통증 없이 잠자듯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한다. 불가의 고승이 “이제 가야겠다.”라며 앉거나 누운 채 홀연히 열반했다는 숭고한 죽음 까지는 아닐지언정 스스로 자신을 돌보며 죽어가는 존엄한 죽음을 꿈꾼다.

 최소한 손주들의 코를 움켜잡게 하는 질병, 욕창, 요실금 등으로 인한 지저분한 냄새를 풍기고 싶지 않다. 기저귀를 차고 지내거나, 이상 치매 행동과 신체구속을 당하거나 무료할 게 뻔한 요양원 생활 등도 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죽고 싶다.

 결국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노인기로 들어서면서부터 대단한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체력이 허락하는 한 할 일은 해내야 한다. 더하여 훨씬 더 많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극한 체험자처럼 몸소 실천해 이겨내야 하는 일상을 견뎌내야 한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으로 인한 나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수하며 질병당국의 관리지침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각종 사고사를 방지하기 위해선 음주운전이나 마약복용 등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금연도 해야 하고, 체력관리도 꾸준히 해야 한다.

 비교적 삶이 여유로운 노인이라면 물질을 더 거머쥐기 보다는 베푸는데 더 고심해야 한다. 과시하려 하지 말고 겸손해지려 노력해야 한다. 여생을 봉사나 이타적인 삶으로 채워나가면 행복감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단연코 좋은 삶은 좋은 죽음과 직결되게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좋은 삶을 만들 수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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