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암 김정선생 500주기 기획연재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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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 김정선생 500주기 기획연재 6편
  • 보은신문
  • 승인 2020.11.19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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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윤휴에게 이어진 뜻

贈釋道心(증석도심)

落日毗盧頂 / 東溟杳遠天 (낙일비로정 / 동명묘원천)

碧巖敲火宿 / 連袂下蒼煙 (벽암고화숙 / 연몌하창연)

비로봉 봉우리에 해 지니 / 동해는 먼 하늘에 아득하네

푸른 바위틈에 불을 지펴 자고 / 소매 이어 푸른 안개 속으로 내려오네 *국역 충암집 하권 14쪽

1516년 가을 금강산에 들어갔을 때 도심이라는 스님에게 준 글로 원주용의 “조선시대 한 시 읽기(상,하)”에도 실려 있고 충암을 대표하는 글로 평가받는다.

백호 윤휴(尹鑴)(1617~1680년)는 『풍악록(楓岳錄)』에서 “이 시야말로 고금의 시인들 작품 중에 빼어나다. 이 시는 우리나라에 전무후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 가는 작품인데, 애석하게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던 것이다”라 말하며 동행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서로 읊고 또 읊고 했더니 “사람으로 하여금 표연히 산 정상을 버리고 동해로 가고픈 생각이 들게 했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증석도심”은 백호로 부터 극찬을 받은 이후에 충암을 대표하는 글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말처럼 알아보는 자가 없는 글을 백호는 어떻게 알고 최고의 시라고 평했을까?

이런 의문은 백호의 외가가 바로 보은읍 종곡리가 집성촌인 경주김씨 판도판서(版圖判書) 장유(將有)의 후예로 충암의 방계 후손임을 알면 풀린다.

경주부윤 이였던 부친을 3세 때 여윈 백호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인 첨지중추부사 간서재 김덕민(金德民)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외조부인 간서재 공은 보은읍 종곡리에 있는 정려문(의열문)의 주인공인 고령신씨의 부군으로 그를 중심으로 집안의 인맥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친은 노성 현감(魯城縣監)이였던 일구당 가기(可幾)다.

조부는 충암의 조카이며 제자인 김제 군수 천부(天富)로 기재 신광한에게 “인쇄하여 썩지 않음을 도모 하겠습니다”라며 충암의 원고와 함께 감수와 서문을 청했던 홍문관 전한 천우(天宇)의 형이다.

천부, 천우 형제는 충암의 4촌형 벽(碧-승지공)의 자제들 이다.

이런 내력은 백호가 쓴 “외조 첨지중추부사 김공 묘지명(外祖僉知中樞府事金公墓誌銘)”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윤휴가 집권세력인 서인으로부터 사문난적이라며 몰리고 사약을 받은 후 보복을 두려워한 외가 집안에서 산외면 장갑리에 있던 간서재공의 묘비를 땅속에 묻어 우리 지역에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1927년 간행된 백호문집(白湖文集)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필자 엄친의 “미산산고” 598쪽 참조)

풍악록에 따르면 금강산 유람에 앞서 부평에 사는 외숙께 인사를 드리고 통제외숙과 함께 출발했음을 전하고 있으니 외가와 매우 긴밀하게 지낸 백호였음을 엿 볼 수 있다.

간서재 공은 옥(鈺-현풍현감) · 용(鎔-익위사 시직) · 상(鋿-원주목사) · 경(鏡-삼도수군통제사) · 익(과-鈛) 5형제를 두었는데 백호가 말한 통제외숙은 바로 경을 말하는 것이다.

백호의 외숙 중 막내인 과만 과거를 단념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나 옥 · 용 · 경 삼형제가 똑같이 정묘년에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 족보를 만들고 농재집이란 문집을 남긴 상은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하니 외가가 매우 번창했음을 알 수 있으나 그의 정치적 숙청과 함께 쇠락하게 되고 후손들은 벼슬길이 막 희게 되었다 하니 못 내 아쉽다.

백호는 외가의 조상으로 기묘명현인 충암의 글을 어린 시절부터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제가 이를 인쇄하여 썩지 않음을 도모하겠습니다“라는 천우의 간절함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북벌을 주창하며 자주적 성리학을 외친 백호의 행적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강대국에도 당당했던 절의로 이름난 전국시대 조나라 재상 이였던 인상여를 높이 평가하며 선비로서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대의로 가득한 삶을 실천한 충암의 정신을 올곧게 이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충암의 큰 뜻을 배우며 품고 자랐을 백호도 역사의 험로에서 같은 운명을 맞고 말았으니 안타깝고 애석하기 끝이 없다.

백호와 우암 송시열의 관계도 우리 지역이 더 발굴해고 가꿔 나가야 할 문화적 자산이다.

송시열은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휴와 만나 3일간 토론하고 나니, 내가 30년 독서한 것이 참으로 가소롭게 느껴졌다”고 말할 정도로 10년 연하의 백호를 높이 평가했지만 예송논쟁과 주자에 대한 학문적 입장 차이 등을 거치면서 멀어졌고 결국은 서로를 죽여야 할 숙명적인 정적 사이가 되었다.

청나라에 항복한 나라의 처지를 통탄하며 함께 의기투합하고 비분강개했던 두 사람의 비극적인 운명의 인연이 시작된 곳이 속리산 복천암 이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호에 이어짐)/김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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