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신념은 현실참여로 이어지고
次希實兄韻(희실 형의 작품에 차운하여)
洪鍾霜未下 / 誰得動壑鳴? (홍종상미하 / 수득동학명)
蒼蒼腰間劒 / 飛電往往成 (창창요간검 / 비전왕왕성)
齷齪滿朝人 / 譬如月急榮 (악착만조인 / 비여월급영)
小人無遠慮 / 目前但營營 (소인무원려 / 목전단영영)
丈夫窮困日 / 抱膝學躬耕 (장부궁곤일 / 포슬학궁경)
終當拂衣去 / 投筆作長征 (종당불의거 / 투필작장정)
세상을 흔드는 서리는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 누구라서 골짝을 울려 소리를 낼까?
파렇게 번득이는 허리에 찬 칼은 / 왕왕 나는 번개가 되곤 했지
좀스런 조정에 가윽한 사람들은 / 마치 달이 둥글게 되는 것과 같다
소인이란 원대한 사려가 없으니 / 그저 눈앞의 일만 힘쓰네
대장부가 곤궁할 때엔 / 좁은 방에 살면서 직접 밭가는 것을 배우리
결국엔 의관을 털고 떠나리니 / 붓을 던지고 긴 행군에 참여하리 *국역 충암집 상권 33~34쪽
충암은 150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년)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이 글은 1506년 21세때 지은 것이라 하니 과거를 준비할 때 쓴 글로 보여진다.
눈앞의 일에만 힘쓰는 소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조정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대장부로서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창과 번개가 되기 위해 붓을 던질 수 있다는 표현은 학문을 포기하고 전쟁터로 나아감을 비유하는 투필종융(投筆從戎)을 뜻하는 말로 선비에게 붓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니 사력을 다해 조정을 개혁 하려는 충암의 의지를 엿 볼 수 있는 글이다.
10.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목숨을 걸면 못 할 일이 없다
藺相如 完璧歸趙(인상여의 완벽귀조)
王風日以降 / 瞻烏于誰屋 (왕풍일이항 / 첨오우수옥)
秦售十二城 / 趙誇如此玉 (진수십이성 / 조과여차옥)
當時藺相如 / 風雲氣絶倫 (당시인상여 / 풍운기절륜)
忽承趙王命 / 捉璧西入秦 (홀승조왕명 / 착벽서입진)
强秦啗術詐 / 畢竟城不入 (강진담술사 / 필경성불입)
公子怒見欺 / 長劍睨柱立 (공자노견기 / 장검예주립)
完歸自伐功 / 位在廉頗右 (완귀자벌공 / 위재염파우)
計謀日云拙 / 幾被澠池虜 (계모일운졸 / 기피민지로)
壯士豈若此 / 公子非眞勇 (장사기약차 / 공자비진용)
暴虎又馮河 / 事有輕且重 (폭호우빙하 / 사유경차중)
兩國爭噬嚙 / 璧乃秦兵餌 (양국쟁서교 / 벽내진병이)
天地相澒洞 / 血成滄海水 (천지상홍동 / 혈성창해수)
强弱自由分 / 竟輸秦王府 (강약자유분 / 경수진왕부)
邯鄲暴白骨 / 鬼哭千萬古 (한단폭백골 / 귀곡천만고)
주왕의 풍모가 날로 쇠퇴하니 / 저 까마귀 부자 집에 둥지 트는 것이 보이네
진나라는 12개의 성을 내놓았고 / 조나라는 이처럼 큰 구슬을 자랑하네
당시에 인상여는 바람과 구름처럼 / 기세가 무리중에 으뜸이었네
문득 조왕의 명령을 받들어 / 구슬을 쥐고 서쪽으로 진나라에 들어갔다
강한 진나라는 거짓 계책을 품고 / 결국엔 12개의 성을 주지 않았네
공자는 속은 것에 화를 내며 / 검을 짚고 기둥을 노려보며 서 있었네
구슬을 지켜 돌아오자 스스로 공을 내세워 / 그 지위가 염파의 위에 있게 되었구나
그의 꾀가 날로 졸렬해져서 / 하마터면 민지 땅에서 포로가 될뻔하였다
힘센 병사라도 어찌 이럴 것인가 / 꾀를 쓰는 공자로서 진실로 용기있는 것은 아닐세
맨손으로 호랑일 때려잡고 또 맨발로 황하는 건넘이니 / 일에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있는 법
두 나라가 다투어 씹으니 / 큰 구슬은 진나라 병사들의 먹이로다
하늘과 땅은 서로 이어져 있는데 / 피는 강과 바다를 이루었구나
강함고 약함은 본래 나뉘어 있어서 / 결국 진나라 왕에게 지게되었네
조나라 수도 한단에는 백골들이 드러나고 / 천년 만년 귀신의 울음소리 들리네 *국역 충암집 상권 247~249쪽
사마천의 “염파, 인상여열전” 내용을 축약해 놓은 글로 아마도 자신의 가치관과 충절을 에둘러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상여는 세치 혀로 당대의 패권국인 진나라에 당당하게 맞서 조나라를 지킨 지혜와 용기를 겸비했던 인물이다.
사마천은 "(사람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이는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라며 인상여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충암은 “지혜와 용기를 갖춘 인물이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은 못 이룰 것이 없다”란 가치관을 다졌을 것이고 그렇게 국가를 위해 일 하겠다라는 자신의 신념을 세상을 향해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인상여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염파를 감화시킨 것은 사적 감정을 누르고 국가의 안위(이익)를 먼저 걱정한 인상여의 말과 행동으로 충신의 기본적 자세로 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매를 청한 염파의 사람됨도 많은 사람들의 표상이 될 만한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의 사이를 사람들이 “우정이 깊어 생사고락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란 뜻을 가진 “문경지교(刎頸之交)“라 불러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사적이익 보다 공적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더 건강한 사회임를 증명하는 항목 중 하나인 것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니 이들을 흠모한 충암의 뜻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8구는 진나라의 계책에 동조하여 조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간신 곽개와 인상여를 비교하여 사적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은 곽개와 같은 간신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은 인상여와 같은 충신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첨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40만명에 이르는 조나라 군대가 몰살당한 장평전투의 비참함을 연상시키는 글을 쓸 리 없었다고 보여 진다.
사마천의 사기 중 “백리해”와 “염파,인상여”편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인상여의 완벽귀조”란 글을 접한 순간에 주제넘게도 국역 충암집을 선택해서 받고 있는 글자들이 주는 고통에서 잠시 벗어 날 수 있었다.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나이 70세에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천하통일의 초석을 다진 백리해와 사마천으로 부터 극찬을 받은 인상여 처럼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세파를 헤쳐가면 뜻 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며 현실의 초라함에도 굴하지 않고 더 나은 삶과 꿈을 이루려는 나름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접한 글이라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 가지 의문은 국역 충암집에 “秦售十二城(진수십이성)”로 나오는 12라는 숫자다.
진 나라에서 자신들의 15개성과 조나라의 화씨벽을 맞교환 하자고 한 것으로 익히 알고 있었는데 국역 충암집에는 12개성으로 기재되어 있다.
사마천이 작성한 원본을 확인할 길은 없으나 김원중 교수가 번역해 놓은 책에도 15개성으로 나와 있다.
어느 누군가가 잘 못 필사한 사기열전을 충암이 접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충암의 착오로 인한 오기 또는 국역 충암집의 오류 등 나름의 생각이 번잡하게 일어났다.
수고를 아끼지 않은 역자가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역자는 “염파가 인상여에게 사과하는 것을 본뜬 편지(擬簾頗謝藺相如書)”를 통해 15개성이 진나라의 속임수 였다는 것을 역주에 달아 놓았다. *국역 충암집 하권 281~288쪽
(다음호에 이어짐)
/김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