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암 김정선생 500주기 기획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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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 김정선생 500주기 기획 연재를 시작하며
  • 김병서
  • 승인 2020.10.15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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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우리지역 출신으로 기묘명현 중 한 분인 충암 김정선생(1486~1521년) 500주기를 맞아 그를 조명하는 기획물을 준비하고 있던 중 본보 1389호에 ‘충암 유적지 답사 소회’를 기고했던 죽전리 출신의 출향인 김병서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김병서TV’를 통해 ‘국역 충암집’을 읽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본사의 기획의도를 설명하는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획 취지에 동의해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 준 필자께 지면으로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지면이 허락해주는 한도 내에서 필자가 소개하는 국역 충암집 내용을 가감 없이 독자들께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글이지만 500년 전 귀향지 제주에서 절명한 보은 출신 충암 김정 선생의 삶을 반추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는 필자의 말을 구독자들께 드리는 그의 인사로 전해 드립니다. 본보의 취지에 동감하는 독자들의 성원과 투고를 통한 많은 참여가 있길 기대합니다. -편집부-

1. 분별없는 용기가 부른 고통에서 벗어나다
강직한 학자적 풍모를 유지하며 집안의 내력과 지역의 역사를 탐구해 오신 엄친은 조선왕조 시기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며 집안의 자부심인 충암 김정선생(1486~1521년, 이하 충암)에 관련된 많은 말씀을 우리 형제들에게 해주셨고 그를 조명한 여러 글을 저술해 놓으셨다.
건강이 여의치 않으신 지금, 엄친 서재의 책들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뽀얀 먼지만 하루하루 더해가고 있는데 ‘국역 충암집’도 그 중 하나다.
엄친의 글들을 되새김하다 국역 충암집을 완독하고 싶은 욕심에 가벼운 마음으로 겉표지를 열었다.
안광철지배(眼光徹紙背) - 눈빛이 종이를 뚫을 듯 정독하여 깊은 속뜻까지 아는 것 - 란 선인들의 가르침을 믿고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계절이 4번 바뀔 동안 뜻대로 되지 않아 책갈피를 넘기지 못하고 마음이 몹시 상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국역 충암집”은 한문학의 백미라 불리는 한시 500여수를 포함해 우리말로 된 한글 번역본과 한문 원본이 함께 기재된 상,하권 총 1,000여 쪽이 넘는 방대한 양을 가진 책이다.
책의 맨 뒤표지를 이제야 겨우 덮었지만 한학과 한시에 문외한이며 배움을 등한시한 미천한 지식을 가진 생활인이 충암의 높고 높은 지식과 경륜을 올 곧이 이해할 수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완독한 것이 아니라 모자람이 넘치는 능력에 대한 성찰 없이 접한 ‘국역 충암집’으로부터 받은 고통에서 단지 벗어 낫을 뿐이다. 그냥 한 번 둘러 봤다고 해야 함이 맞을 것 같다. 고향 보은과 선비로서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글과 충암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몇 수의 시는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이해했다고 할 수 있어, 분별없이 함부로 날뛰는 힘에 기대어 나름의 후기를 기록해 두기로 했다(겁 없는 용기를 낸 17대 방계 후손을 어여삐 여긴 충암의 음덕이 함께했다고 생각한다)
전문 지식이 없는 부족한 소양 탓도 있지만 한문으로 쓰여진 원본을 한글로 번역해 놓아 우리 말의 맛깔스러움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점은 못내 아쉽다.
더 쉽고 간결하며 깔끔한 글을 통해 문학적 표현력이 한 층 넉넉하게 가미된 또 다른 국역본이 나타나길 바라며 역자의 노고와 충암 종중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서문을 통해 본 편찬 과정
충암은 유배지인 제주에서 사사(賜死)된 후 수학했던 회덕 계족산 법천사 부근에 모셔졌다.(지금의 대전광역시 구역으로 현재의 묘역은 대청댐 건설로 이장된 곳이다) 남겨진 유고는 조카이며 제자인 천부, 천우 형제등의 주도로 집안에서 출간을 위해 엮은 후 홍문관 응교로 있던 천우가 기재(企齋) 신광한(영의정 신숙주의 손자)에게 감수와 서문을 부탁한 것으로 보이는데 기재는 서문에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충암집은 김정 대감이 지은 것이다. 대감의 자는 원충이고, 관직은 판서에 이르렀다. ~~~중략~~~ 당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은  데다 집안을 떠받칠 자제가 없었기 때문에 유고는 흩어져서 수습되지 않은지가 오래되었다.”
기재에게 시와 문장을 들고 온 천우는 “저의 숙부인 원충공 께서는  청년시절부터 문장의 품격이 높았으며, 또한 학문에서의 조예는 더욱 깊어서, 사대부들이 크게 평가하고 복종하였으나, 몸이 죄의 그물에 빠지니 ~~~중략~~~ 요즘 보자니 조정에 있어서 사기가 약간 진작되었고, 공론 또한 행해지니, 충암의 시문도 이때에 채택되기에 알맞습니다. 원컨대 공께서 약간 그 편차를 손보아 주신다면, 제가 이를 인쇄하여 썩지 않음을 도모 하겠습니다”라 말했다고 한다.
기재가 차일피일 미루던 중 천우는 그 뜻한 바를 이루기 전에 세상을 등졌으나 공주 목사인 허백기(정암 조광조의 문인)가 권수의 서문을 써서 원고와 함께 보내주기를 기재에게 청한 후 허백기에 의해 편집되어 1552년 공주에서 간행되었다.
“제가 이를 인쇄하여 썩지 않음을 도모하겠습니다“라는 천우의 간절함에 저절로 숙연해 지는 것은 비단 혼자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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