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실 일기
상태바
늪실 일기
  • 홍 근 옥 (회인해바라기작은도서관)
  • 승인 2018.11.22 09: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듬직한 산을 등지고 맑은 물을 안고 있는 편안한 곳, 내가 드나들기는 좋지만 외부인들 출입은 비교적 적은 한적한 위치, 잘 보존된 옛날 모습과 넉넉한 이웃들의 인심이 남아 있는 마을, 영화에 나온 동막골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 회인면 눌곡리, 옛 이름으로 늪실이라는 곳이다. 내가 이 마을에 자리 잡은 것은 7년 전, 건강이 나빠져 운영하던 작은 도서관을 접고 쉬고 있는 나에게 평생 전원생활을 꿈꾸던 남편이 시골로의 이주를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눌곡리와의 첫 만남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인터넷 장터에서 본 매물을 확인하고자 땅을 보러 온 우리 부부는 신작로에서 벗어나 오래된 느티나무가 줄지어 선 동네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오래 전에 사라졌을 법한 두레박 우물과 잔설을 이고 있는 돌기와 지붕, 좁은 골목을 사이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오래된 집들은 마치 손을 뻗어 서로를 끌어안듯이 돌담으로 이어져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장작을 패고 계시던 어르신 한 분은 남편에게 왜 왔는지를 묻고는 괜찮은 동네이니 웬만하면 이 마을에서 함께 살아보는 게 어떠냐는 말씀을 건네신다. 처음 보는 외지인에게, 더구나 시골 집성촌의 나이 드신 어르신에게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치 홀리듯이 이곳에서 살기로 마음을 정해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맘에 드는 땅을 선택한 게 아니라 눌곡리와 내가 눈이 맞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시골생활은 나에게 셀 수 없는 행복과 휴식을 주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나물과 먹을거리들의 향연, 적당한 노동과 땀이 주는 행복, 가끔씩 어르신들이 농사지었다고 갖다 주시는 호박과 상추,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반딧불이의 춤까지. 도시 생활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이곳에서는 일상이었으니 그 행복감을 말해 무엇 하랴. 거기에다 나는 특별한 선물 하나를 더 받았는데 그건 하루아침에 새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오십을 훌쩍 넘겨 중늙은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내가 나이 드신 어르신들 눈에는 아직도 한창때로 보였는지 스스럼없이 새댁이라고 부르셨고 나는 헌 댁도 한참 지났는데 웬 새댁이냐고 깔깔거리면서도 그 말이 싫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새댁이 되고 보니 배울 일도 많아졌다. 밭고랑 타고 비닐 넣는 요령부터 콩 심고 타작하는 시기, 키질에서 메주 쑤고 된장 만드는 일, 봄이면 산나물을 뜯고 가을이면 감을 깎아 매다는 것도 모두 나에게는 처음 해 보는 도전이었으니 얼마나 가슴 떨리는 재미진 체험이었으랴. 수십 년씩 해 오신 베테랑 선수들에게서 특별 강습을 받고 때로는 재료에 손까지 보태 주는 호화로운 체험을, 그것도 무료로 할 수 있으니 이정도면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하는 게 아니라 인생을 바꾼다고 해야 할 지경이다. 그렇게 7년, 이제는 지루할 것 같은데 그럴 틈이 없다. 농촌생활의 체험코스는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계절별로 주변에서 나는 것들로 절기밥상을 만들어 보고, 회인면과 보은군의 역사도 공부해 보고, 틈틈이 광목천에 수를 놓아 집도 꾸미다보니 즐길 거리가 끊이질 않는다.
도시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불편하지 않냐고 묻곤 한다. 교통이 불편한가에서 시작된 질문은 병원과 마트 가는 일부터 문화생활은 어쩌느냐 무섭지는 않느냐 눈이 오면 어떡하냐……. 어떡하든 불편하다는 말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질문을 퍼부어댄다. 내가 다 괜찮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뭔가를 숨기고 있거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으리라는 의심의 눈빛을 거두질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준비했다. 그래, 불편하다. 그런데 재미있다. 내가 배울게 많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있고, 나를 새댁으로 불러주는 친절한 어르신들이 있으니 나는 불편함이 재미거리로 느껴지는 걸 어쩌냐. 너흰 편하게 살아라, 나는 재미있게 살란다.
이리하여 불편하면서도 재미있는 나의 소소한 새댁생활을 늪실 일기라는 이름으로 틈틈이 적어볼까한다. 물론 지면이 주어진다면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