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水災)’ 그 해, 그 때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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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水災)’ 그 해, 그 때의 교훈
  • 최동철
  • 승인 2018.08.0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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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그렇듯이 가뭄과 폭염 뒤에는 폭우가 뒤따르는 경우가 많다. 전국적 폭염 속에 며칠 전 강원도 강릉 등지에는 시간당 93㎜의 장대비가 쏟아졌다. KTX 강릉역 등 건물과 도로 침수 등 피해가 잇따랐다. 항시 그러하듯 자연재해는 눈 깜박할 새 뜻밖의 피해를 준다.

 우리 고장 ‘보은군’은 폭우, 즉 집중호우지역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역대 기상자료에 따르면 강우일수, 강우량 , 강수량 그리고 시간당 강우량에서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지역적 특성 때문이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다. 해발 고도가 높다보니 좁은 계곡이 많고 물 흐름도 빠르다. 비를 동반한 태풍이나 폭우를 머금은 먹구름이 온다면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는 지형이다. 평소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수해예방체제가 갖춰있지 않다면 엄청난 피해를 볼 수 있다.

 192년 전 조선시대, 그 해도 올해와 같은 무술년(戊戌年)이었다. 11살에 왕이 됐던 순조가 26년 째 치국하던 1826년에도 보은에 큰 수해가 났다. 순조실록에 따르면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이 111호이고 6명이 익사’했다. 충청감사 김학순은 그 원인이 ‘폭우’때문이라 했다.

 아마도 40대 중반 이상의 나이 대가 돼서야 비로소 기억을 하겠지만 38년 전, 1980년 ‘대홍수’는 그야말로 끔찍했다. 302㎜의 장대비가 하루 동안 집중적으로 쏟아져 장속저수지 둑이 무너졌다. 순식간에 보은읍 전체가 3시간가량 물속에 잠겼다.

 지붕과 옥상으로 피신한 주민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당시를 겪었던 한 주민은 블로그에 “보은사거리에서 우회도로까지 오는데, 물이 내 가슴위에까지 오는 그 거리를 간신히 빠져 나왔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때 수재로 급류에 휩쓸려 2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읍민 2,360가구 1만3,000여명 모두가 수재민이 됐다. 18년 뒤인 1998년 8월11일에도 일일 강우량 407mm라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산사태 및 주택, 농경지 매몰, 침수 등 많은 피해를 입혔다.

 당시 8월22일자 보은신문에 공군기상예보관 출신 김태훈씨가 ‘목숨을 걸고 물바다 속에서 수천 명의 주민을 대피시키고 구했던’일화가 기고 형태로 실려 있다. 기상전문가답게 공군기상대 협조를 받아 실황 중계하듯 실시간으로 관민이 수재방비를 하게끔 진력했다.

 그가 당시 기고를 통해 보은군의 수해예방 문제점과 대안을 지적하고 나섰다. 수해예방 훈련부족으로 인한 안전 불감증, 기초적 기상정보 지식부족 등을 지적했다. 강우기 직전, 민관군 합동 민방위 훈련으로 수해예방 및 복구훈련 실시, 공군기상대와 유사시 정보지원 협약, 재해관련 공무원의 기초 기상관련 지식 습득 등은 그 대안이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처럼 그 해, 그 때의 수해를 통해 유비무환 태세를 갖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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