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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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추함
  • 소설가 오계자
  • 승인 2018.04.0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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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파괴. 죽음과 부활, 아름다움과 추함.
이모두가 인간에게는 극이지만 신에게는 같은 개념? 요즘 라틴아메리카 문명 강의에 푹 빠지고 있다. TV를 켜도 강연 프로만 본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하지만 ‘신은 창조를 위해 놀이를 한다.’고 메소아메리카 원주민은 믿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우주는 신의 희생을 통해 창조 되었고 우주만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도 희생해야 된다는 개념이다. 그 희생제의를 위해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시작하고 그 꼭대기는 살아있는 인간이 제물로 희생되는 제단이다. 그래서 멕시코 피라미드는 목이 잘린 형상이다. 
그들이 믿는 태양의 신은 하늘에 있고 그 하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깝기 위해서 sv게 피라미드를 만들어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어쩌면 문자도 없던 마야인들이 천문학만은 고도로 발달한 원인도 오직 태양신이 존재하는 하늘에 바치며 섬기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든 것이 계기가 되었지 싶다. 
피라미드는 공간의 상징이면서 시간의 상징이다. 시간을 공간화 했다고 할까. 그 유명한 유적 ‘태양의 돌’이나 피라미드에 새겨진 그림을 통해 알려진 바는 마야인들의 카렌다는 음력과 양력 두 가지가 존재했다. ‘태양의 돌’에 새겨진 584라는 숫자와 행간 등 어려운 세부까지 꺼낼 것 없이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숫자가 저녁엔 개밥바라기요 새벽엔 샛별이라고 불리며 아침저녁 만나는 금성의 공전과 일치하는 숫자란다. 그들의 셈으로 금성과 태양은 같은 선상에 위치하며 이것은 한 주기의 끝과 다른 주기의 시작을 의미한다.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끝은 곧 시작이 되고 죽음은 부활로 파괴는 창조로 이어진다.
아름다움과 추함이란
70년대 말 멕시코 중앙광장 공사 중 거대한 돌 조각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대지의 어머니 신’이다. 희랍시대의 아름다운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왕립 신학대학에 옮겨 놓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묻혀있던 곳에 묻히고 만다. 심장이 몸 밖에 조각되어 있는가 하면 뱀으로 된 치마를 두르기도 하며 그 모양새가 하도 끔찍하고 추해서 다른 예술품을 욕되게 한다는 것이 묻힌 이유 중 하나다. 결국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멕시코 인류학 박물관의 멕시카 유물관 중앙에 모셔져있다.
추하다고 버림받던 조각상이 중앙으로 모셔지기까지는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이 보고 판단해서 버려지고 인간이 그 소중함을 발견해서 다시 모셨다. ‘대지의 어머니 신’ 조각품이 아름다움이란 개념으로 판단해서 모셔진 것일까, 단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기준으로 지금 모시고 있는 것일까.
김용욱님은 아름다움과 추함을 아래와 같이 논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존재 그 자체의 기하학적 완전성만을 추구했으며 그 상징적 모순과 갈등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즉 인간의 아름다움만 논증을 통해 주장하려고 했지 그 이면의 추함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또 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사랑할 줄 몰랐다. 그들에게는 진정으로 심미적인 우주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상주의의 오류에 빠져있는 철학자들과는 달리 아테네 비극의 천재들은 인간 존재 자체가 깔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천착穿鑿했다. 비극이란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서, 즉 영원히 완전할 수 없는 존재로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마야인들은 이미 인간의 이면에 존재하는 추함까지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 그 이면 까지 조각으로 표현했다. 돌 조각상 ‘대지의 어머니 신’(코아틀리쿠에)은 인간의 문제들을 포용하고 존재 자체를 천착한 작품이다. 어머니의 이면까지 아름답게 여기고 존경한다는 의미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없다. 다만 인간의 생각 차이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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