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군의 근대사를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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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군의 근대사를 주목하자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7.12.2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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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을 지정학적으로 설명할 때 항상 나오는 말이 보은군의 큰 삼산(三山)과 작은 삼산을 이야기 한다.
큰 삼산은 속리산, 금적산, 구병산이고 작은 삼산은 사산(蛇山), 와산(蛙山), 저산(猪山)으로 이야기 한다. 여기서 작은 삼산을 이야기 하면서 뱀과 개구리, 돼지가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관계라는 점에서 서로 견제하고 갈등이라는 말로 확대 해석하는 경우를 보았다.
하지만 이를 긍정으로 보면 세상의 이치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뱀과 개구리, 돼지는 생태계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생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연적 순리라는 점이다. 누가 누구를 잡아 먹는다는 논리가 아니라 상대가 있어야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로 접근할 수 있다.
또 견제(牽制)의 사전적 의미는 경쟁 대상이나 감시 대상이 지나치게 세력을 가지거나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누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긍정으로 보면 치우침 없는 균형있는 발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면 보은 땅은 삼년산성이라는 신라가 북방진출을 위해 난공불락의 성이 존재했기에 신라 땅이라고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삼국의 각축장이었다는 점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와의 각축장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포함하고 있다. 고대 삼국이후 보은군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접경이라는 점에서 행정구역 역시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 들었다.
일제강점기이후 보은군의 행정구역은 문화적 환경보다는 통치를 위한 행정 편의적인 잣대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되었다. 해방 후 보은군은 생활권은 무시된채 정치적 논리에 의해 하나의 속리산을 두고 경상도와 충청도로 분리시켜 놓았으며 지리적 환경이 다른 회인과 보은, 다시 속리산이라는 보이지 않는 지리적 환경을 하나로 통합시켜 놓았다.
특히 백두대간의 연결선상에 위치한 속리산을 중심으로 한남금북정맥으로 나눠진 한강과 금강줄기로 나눠진 지리적인 특징은 후대 신라와 백제의 갈등, 전쟁으로 인해 많은 문화, 역사적 근거를 남긴 곳이 보은이다.
결국 보은군은 지정학적으로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긍정과 부정이 함께 존재하는 지정학적인 영향이 미래를 위한 지표로 제시되고 있다.
지역 발전의 토대는 분명 긍정적인 지정학적인 장점을 살리고 부정적인 측면을 얼마만큼 씻고 미래를 준비하느냐에 따라 지역발전의 견인차를 만들 수 있다.
보은군이 가지고 있는 지금의 역사와 문화는 보은군이 미래를 위한 중요한 발판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런 보은의 역사문화는 30년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보은군의 존재여부에 대해 그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보은군의 근대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중요한 문화와 역사가 되고 있다. 보은과 연관되어 있는 근대 인물의 발굴과 근대 사료의 발굴은 30년후 보은군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보은군의 역사와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93년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인 보은취회와 관련된 역사와 일제에 항거한 독립유공자, 6.25 전쟁으로 인한 지역의 대사소사, 근대화 과정에서 지역발전을 위해 견인차 역할을 해온 지역의 선구자등에 대해 지금 조사하고 발굴하지 않으면 30년후 보은군의 존재가치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지금 한국사의 중심에는 분명 지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은군의 역사와 문화는 분명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지정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은군의 존재가치를 높일 수 있는 보은의 근대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서둘러야 할 때이다.
/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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