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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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농부
  • 최동철
  • 승인 2017.11.09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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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모레 ‘11일’은 ‘농업인의 날’이다. 농부라는 자부심을 키우고 일 년간의 노고를 위로하기위해 제정됐다. 하필 11월11일이 농업인의 날로 지정된 이유는 한자 11(十一)을 합치면 흙 토(土)가 되기 때문이다. 더하여 이 날을 ‘가래떡 데이’라는 쌀 소비의 날로 지정했다.

본디 잡곡(피 ·기장 ·조 ·보리 ·밀 등)을 주식으로 하던 우리 민족이 쌀밥 중심의 식생활로 전환된 때는 어림잡아 통일신라 때쯤으로 파악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이다. 거친 잡곡을 먹다 부드러운 쌀밥을 맛보았으니 자연스레 쌀의 가치는 급상승했다.

정치, 경제, 농업적 측면, 거의 모두에서 쌀은 권력과 부를 축적하기위한 최고 수단이 됐다. 쌀 주생산지를 차지하기위한 귀족 간, 세력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마치 ‘마피아 세력다툼’처럼 끊이지 않았다.

쌀은 ‘귀족식품’으로 인식됐다. 평민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당시 자료에 북부지방은 조, 남부지방은 보리, 귀족층은 쌀이 주식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쌀은 물가의 기준이었고 벼슬아치에게 지급되는 ‘녹봉’이었다.

재배기술 발달로 쌀 생산량이 좁쌀을 앞서기 시작한 조선시대 이후부터 쌀은 대중화가 됐다. 하지만 쌀은 여전히 ‘천석꾼만석꾼’하며 부의 척도노릇을 했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있어 쌀은 귀중한 가치였다.

인구가 약 2,600만 명이던 일제치하의 1942년에 한반도에선 2,500만 섬의 쌀이 생산됐다. 일제는 1/2을 일본열도에 보냈고 우리에겐 잡곡과 혼식하게 했다. 광복 후 일본 반출은 중지됐으나 한국전쟁으로 피난민 등 남한의 인구가 2,200만 명에 이르러 쌀은 늘 부족했다.

‘베이비부머’시대 도래 등 인구의 급속한 팽창은 굶주림을 더욱 가속화 했다. 쌀을 증산하자는 ‘4H' ‘새마을운동’이 펼쳐졌고 '통일벼‘가 심어졌다. 불면 날아간다는 ’안남미‘도 수입됐다. 학교에선 ’도시락 검사‘가 실시됐고, 일반 식당에서도 혼식과 분식만을 팔아야 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비로소 쌀 생산량이 600만 톤을 상회하며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했다. 쌀 생산의 피크였다. 벼(米)가 쌀밥이 되어 밥상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땀이 깃든 ‘여든 여덟 번’의 농부의 손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쌀은 힘든 농사과정을 이겨낸 결실이다.

헌데 요즘은 오히려 쌀이 남아도는 형국이다. 매년 쌀 소비량이 감소추세다 보니 비축미 보관료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피자와 햄버거 등 인스턴트식품이 주식으로 바뀌고 있다니 격세지감이다. 삼시세끼마다 먹던 식탁 위 쌀밥이 2번이나 1번으로 줄고 있단다.
현상이 이러하니 농부와 정부는 추곡수매가로 매년 애를 먹는다. 쌀과 농부의 미래가 어찌될지 걱정이 앞선다. 어쨌든 ‘농업인의 날’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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