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인 북수청풍의 숨겨운 보물, 시인 오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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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 북수청풍의 숨겨운 보물, 시인 오장환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7.08.24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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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보은의 명소를 찾아서(12) 오장환 생가 및 문학관
▲ 오장환 문학관 및 생가 전경사진.
“시골마을에 오장환의 시로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 시인 오장환.
청주에서 보은으로 향하는 25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회인면 중앙리가 나온다. 옛 시골마을의 정취도 느낄 수 있지만 면소재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만큼 7~80년대 상가의 모습이 제법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상가가 형성된 중심도로를 중심으로 하천이 흐르고 아미산성이라 불리는 나지막한 산과 마을 뒷산에는 송정봉(松亭峯)이라 불리는 두 산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한 마을이다.
송정봉 왼쪽은 사직봉(社稷峯)으로 사직단이 있고 오른쪽은 금수봉이며 봉우리 아래 돌출된 언덕은 말 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또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의 회인 현감들이 머물다 간 객사가 남아있다. 이 객사는 일제시대에는 보통학교로 사용하다가 면사무소 또는 예비군 중대본부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앙리의 명소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시인 오장환의 생가와 문학관이다. 오장환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은 2006년 개관하여 많은 문인 및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시인 오장환은 “문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이다.
조선시대 한양을 출발해 청주를 지나 보은으로 가기 전 만나는 어진골 회인면 중앙리는 회인팔경의 하나인 ‘북수청풍’ 의 마을로 어진 사람들과 맑은 바람이 불고 있는 마을에 오장환의 생가와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 오장환(1918~1951)은 1930년대 후반 백석, 이용악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현대시인이다.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난 오장환시인은 1951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아버지는 오학근, 어머니 한영수 사이에서 1918년 5월 15일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났다.
시인 오장환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서당교육을 받았고 회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까지 회인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후 1927년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로 이사를 하면서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한 후 그곳에서 1930년에 졸업하였다. 여기서 시인 박두진과 같은 학년으로 졸업할 때까지 동문 수학을 하게 된다.
안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하고 1931년 중동학교 속성과를 수료한 후에 그해 4월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시인 정지용을 만나 시를 배우게 되고 문예반 활동을 하며 정지용이 창간 때부터 관여한 교지 『휘문』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중 『조선문학(朝鮮文學)』에 「목욕간」을 발표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4년 2월에는 소파 방정환이 발행하던 『어린이』 지에 바다를 비롯한 3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1934년 7월부터는 김기림 시인의 소개로 《조선일보》에 동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애기꿈」, 「소꼽노리」, 「맴맴」 등 40여편을 1937년6월까지 발표하였다.
1936년 3월 지산중학교를 수료한다. 귀국후 서정주, 김동리, 여상현, 함형수 등과 『시인부락』, 『낭만』등의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이듬해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했다.
어려서 박두진시인과는 안성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일본 지산중학에 유학하고 온 뒤부터는 서정주, 김광균, 이육사시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1937년에 첫 번째 시집 『성벽』, 1939년에 두 번째 시집 『헌사』를 내고 난 뒤에는 “문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서정주 시인은 전한다.
일제 말기 단 한편의 친일시를 쓰지 않으면서 그 어둡고 궁핍한 시기를 견딘 오장환시인은 신장병을 앓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의 감격과 혼란,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꿈과 열정, 부끄러운 심정 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시집 『병든서울』 을 발간하였다.
이 시집은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최종후보작에 오르는 등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절정의 노래」는 중학교 5,6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해방 공간의 혼란기에 오장환 시인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나 통일에 관한 문제를 잘 해결해 주길 바라며 지방으로 문화 선전활동을 다니며 시낭송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테러를 당해 치료할 곳을 찾아 남포로 갔고 거기서도 치료를 할 수 없어 소련 모스크바 볼킨병원으로 후송을 갔다. 그리고 6.25전쟁의 와중에 치료를 받지 못한 채 34살의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떴다.
보은의 지역신문을 통해 1996년을 시작으로 제1회 ‘오장환문학전’ 행사가 개최되면서 매년 시인 오장환의 선양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주요 행사로는 오장환 백일장을 비롯해 시그림그리기, 생가 작은음악회, 시 노래 어린이합창 경연대회, 학술세미나, 오장환시인 다큐영상 등이 펼쳐진다.
아울러 시인 오장환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뜻으로 매년 탁월한 시집을 발표한 작가를 선정하여 시상함으로써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오장환 문학상 및 오장환 신인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며 문학제(시낭송·시노래 등), 각종 체험행사 등이 펼쳐진다. 올해로 22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오장환문학제는 내년 오장환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
2006년 개관한 오장환 문학관과 생가는 작은 공간이지만 오장환 시인을 추억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 자리매김되어 젊은 문학도들과 일반 관광객들에게 각광 받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오장환 문학관과 생가 주변의 옛 시골 중소도시의 풍취와 근대시인 오장환을 만나는 즐거움은 여행의 풍격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은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오장환문학관이 위치한 회인면 중앙리 마을.


▲ 해마다 오장환문학관에는 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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