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1일에 영동 영국사(은행잎 시낭송회가 열리는 사찰) 아래에 있는 천태국민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었다. 진눈깨비가 내리어 진달래, 벚꽃들이 피어나다 꽃봉오리 오돌오돌 떨고 있던 봄날이었다. 영동에서 버스를 타고 호탄강가에서 내려서 저 멀리 지붕만 아득히 보이는 학교를 향하여 한 30분쯤 걸었다. 진눈깨비와 눈물이 범벅이 되었던 그 길이 오늘 왜 눈앞에 어른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녹슨 함석지붕을 얹은 낮으막한 그 교정이 오늘 왜 이리 생각이 나는 건지 모를 일이다.
첫 발령을 받고 교단에 발걸음을 내딛던 날, 선친께서는 나를 무릎 꿇게 하시고는 교육철학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마지막으로 훈육하셨다. 말씀의 요지는 그랬었다. 첫째는 아이들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어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며, 어린 아이에게도 예절을 지키며 홍익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네 개인의 욕심을 이제 많이 내려놓고 그 빈 공간에 많은 아이들을 채우고 살아갈 수 있도록, 확실한 교단의 목적과 비전을 가지라는 말씀이셨다. 내 나이 22세에 좀 어렵고 생소한 교육 이론인지라, 조급한 마음에 어설픈 대답만 하고는 초임지로 떠났던 일이 오늘 새록새록 사무쳐온다. 처음으로 보은 읍까지 따라오셔서 작은 양품점에서 체크무늬 겉옷 하나를 사 주셨다. 잘 가서 잘 가르치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음성이 오늘 또 왜 이리 그리운지 모르겠다. 나도 오늘 마지막 졸업식에서 그 무엇보다 인성이 올바른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였으며, <사과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어도 씨앗속의 사과는 셀 수가 없다>라고 설명하며, 자기 속에 숨겨져 있는 귀중한 보물을 꼭 캐내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커다란 버팀목으로 자라라고 당부하였다. 돌이켜보니 내 것인 양 익숙해진 아이들의 숨소리를 엿들으며 정처없이 떠다니던 부평초 여정이었다. 나는 이제 이별의 닻이 내려진 자리에 안주의 깃발이 채워질 새봄의 강가에 서 있다. 황토진흙 마르는 내음으로 울려오는 낡은 오르간 소리에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2월의 시린 물에 두발 담그고 마지막 노래를 부르노라면 버들개지 연하게 피어나는 그 강가에 새 봄이 다시 채워질 것이다.
요즈음 가끔 지인들을 만나게 되면 퇴임을 앞둔 나에게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뭘 하며 지낼거요? > 이다. 나는 그때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답은 하나뿐일 것 같다. 그 어느 일보다 내 안을 들여다보고 살피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싶다. 이제껏 나도 모르고 살았던 참 자아를 만날 수 있겠다는 설레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안 보이던 사람들과 상황들이 조금씩 보일 것만 같은 막연한 설레임이다. 새 사립문을 힘껏 밀고 나가면 다시 내 둥지를 유혹하는 손짓이 기다려 줄 것만 같은 설레임이다. 그러니 4막4장쯤 되는 남은 여정을 위하여서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마지막 훈육을 소홀하지 말아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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