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공병진’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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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공병진’ 유감
  • 최동철
  • 승인 2017.02.0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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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혁 보은군수가 올 신년사에서 ‘농공병진의 새 시대를 열어갑시다’하고 또 한 번 외쳤다. 현재 ‘보은군은 농공병진의 새 시대를 열어가며 다방면에서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라는 사족도 덧붙였다.

정 군수의 ‘농공병진’은 2014년, 재선에 성공한 후 "보은군은 지난 50년간 지속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지만 2014년을 기점으로 증가세로 전환되고 전형적인 농업군에서 우진플라임 분양과 보은산업단지의 착공으로 농공병진의 새 시대를 맞았다"고 첫 거론됐다.

농공병진(農工竝進)이란 말은 본래 한반도를 강제 식민지화한 일본제국이 만들어 낸 용어다. 즉, 1929년 미국을 시발로 세계대공황이 발발하자, 1930년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화 일환으로 실시한 조선식민지 농촌공업화 정책인 ‘농공병진정책’에서 비롯됐다.

1931년 만주 침략을 통해 일본과 조선, 만주를 잇는 이른바 ‘일선만(日鮮滿) 블록’의 경제권을 구축하고, 식민지 및 점령지의 개발과 수탈 구조를 통제하여 자급적 경제 체제를 만들어가려했다. 일본은 정밀공업, 조선은 기초공업, 만주는 농업·원료지대인 분업적 개발론 이었다.

1936년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는 조선식민지 통치의 5대 정강 중 하나로 ‘농공병진’을 표방했다. 피폐된 농촌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었다. 몰락하여 불만이 그득한 소작농의 잉여노동력을 기초공업인력으로 흡수시켰다. 농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식의 ‘농공병진 시대’는 끝을 맺는다. 전시경제통제가 본격화되고 군수공업 중심의 병참 기지 정책으로 변용되었다.

우리나라 식의 ‘농공병진’은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민주화운동가였던 박현채 교수가 70년에 발표한 ‘농공병진이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농업이 공업에 대한 원료 및 식량의 공급원으로서 또한 공업제품의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견해를 강조하면서 경제자립과 관련된 농업의 위치와 역할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농공병진은 농공업간의 분업 관련에 의한 농업위기의 해소와 공업용 원자재 및 식량의 국내자급을 당위적인 자기 내용으로 하여야 한다. 농업생산력의 상대적 정체를 소경영양식의 극복으로서의 농업혁명에 의해 청산, 극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농업내적 담당주체는 직접적 생산자인 소농민의 협동적 경영인 협업에서 구해야 한다.’

짚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농공병진’은 일제의 잔재 용어다. ‘농공약진’ 이나 ‘농공조화 발전’ 등 다른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청정지역인 보은군은 어쨌든 농업이 기반이다. 공업은 부수적인 어쩔 수 없는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인근 도시와 연계하여 농촌의 공동화와 도시의 과밀화를 해결하는 방안모색이 바람직한 ‘농공약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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