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의 이슬 된 ‘루이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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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의 이슬 된 ‘루이16세’
  • 최동철
  • 승인 2017.01.1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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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이 ‘루이 오귀스트’인 루이 16세는 1792년 9월21일까지 약18년 간 프랑스 지역을 통치한 국왕이다. 원래 루이15세의 셋째 손자로 왕권 승계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형들이 요절하고 왕세자였던 아버지마저 죽자, 천연두로 서거한 할아버지의 왕권을 20살에 물려받았다.

왕이 된 그는 재정난에 허덕이던 프랑스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사회개혁을 꿈꾸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추진력, 무엇보다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적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본래 왕세손이었던 큰형의 정략결혼 대상자였던 적국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청혼을 받아 결혼한 것도 불행의 씨앗이 됐다. 심한 포경(包莖)이었던 루이16세는 성행위가 고통스러웠고 화가 난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멸시를 감내해야 했다.

이 때문인지 그는 부인이 나랏일에 깊숙이 관여해도 상관하지 않았으며 귀족들과 사치를 위해 돈을 물 쓰듯 쓰게 했다. 당시 프랑스의 고질적인 사회적 모순은 세금이라고는 단 한 푼도 내지 않는 면세특권을 가진 귀족들의 생활상이었다. 문벌이 사회적 성취와 출세를 좌우했다.

요즘 우리사회에 은연 중 만연하는 ‘금수저와 흙수저’론의 넋두리와 일맥상통한다. 좌우지간 루이16세 통치 때까지 프랑스 왕정하의 신분계급은 세 가지로 구분됐다. 제1신분은 성직자다. 성직 점유율 10%에 해당하는 주교 등 고위 성직자는 귀족출신이다. 제2신분은 프랑스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귀족과 왕족이다. 제3신분은 전체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도시민과 농촌민이다. 이 중 약 8%는 부르주아지(중산층)였다.

어쨌든 세금도 내지 않는 귀족들의 호화사치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악화된 재정을 충당해야 할 비책이 요구됐다. 금연 증진을 빌미로 담뱃세 인상하듯 세금을 올리든가 새로운 세금을 부과 하던가 해야 했다.

루이 16세는 세금을 더 거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과세의 승인을 요구하기 위해 170년 만에 세 신분의 대표자가 모이는 삼부회를 소집했다. 이것이 화근이 됐다. 머릿수에 따른 표결이 강력히 주장되면서 삼부회는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의회로 발전하였다.

급기야 루이 16세는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를 무력으로 탄압한다. 결국 의회와 파리 시민은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평등해야 하며, 정치를 하는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는 '인권선언'을 발표하고 대혁명을 달성한다.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 선 루이 16세는 군중을 향해 “기소된 모든 죄목으로부터 결백하다”며 무죄를 외쳐댔지만 공허한 메아리였다. 아마 요즘 ‘국정농단’을 바라보는 민심도 적폐 된 왕권정치에 성난 그때 파리시민들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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