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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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
  • 최동철
  • 승인 2016.11.1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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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등의 권력자가 직위에서 물러나는 것을 ‘하야(下野)’라고 한다. 지난 12일에는 ‘100만 인파’가 촛불을 든 채 ‘대통령 하야’를 요구했다. 역대 최대 인파라고 한다. 국민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촌구석에서조차 느낄 수 있었다. 오는 19일에 또 집회가 예고되어 있다.

우리 국민은 이미 한 차례 ‘대통령 하야’경험을 가지고 있다. 1960년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과 이른바 ‘승리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4월26일,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옛것에서 새것을 알 수 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의미처럼 당시를 돌이켜 보자. 서중석의 ‘이승만과 제1공화국’에서 일부를 발췌했다. 1960년4월26일, 새벽 5시경부터 데모의 기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모든 차량의 운행은 중지됐다.

인터넷, 스마트폰, 에스엔에스(SNS)도 없던 시절이라 누가 모이라고도 시위하자고도 하지 않았지만 학생들과 시민들은 세종로 또는 국회의사당 쪽으로 몰려들었다. 아침 6시 가까이 되자 군중은 “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오전 9시경에는 이미 3만여 명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다. 청소년 데모대가 “군인들은 우리 편이다”라고 외치며 광화문 네거리에 배치된 3대의 탱크 위에 빼곡히 올라탔다. 군인들은 방임 상태였다.

청소년 등 약 5천 명의 군중이 “경무대로 가자”면서 중앙청으로 향하자 광화문 바리케이드에서 최루탄이 발사됐다. 흩어졌던 시위대가 다시 대오를 갖춰 나아가자 10시경부터 콩 볶듯 허공을 향해 총이 발사됐다.

4·19 때 동급생을 잃었던 수송초등학교 어린이 1백여 명이 “국군 아저씨들,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피켓을 들고 애절한 시위를 벌였다. 결국 시민·학생 대표 5명과 만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을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10시30분 하야성명이 발표됐다.

누가 봐도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은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승만의 권력 유지를 위해 애쓰지 않았다. 다만 이승만은 미련을 가진 채 막판까지 최후의 안간힘을 다했다. 급기야 27일 국회에 제출할 사임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자신이 사임하자마자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고 막무가내 우기며 버텼다. 하지만 ‘나 이승만은 국회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는 사임서에 서명해야 했다.

28일 권력의 버팀목이었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그의 큰아들이자 이승만·프란체스카의 양자인 강석과 둘째아들 강욱이 경무대 관사에서 자살했다. 그날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갔다. 다음날 29일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승리한 국민들은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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