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으로 점철된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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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으로 점철된 6월
  • 최동철
  • 승인 2016.06.16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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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월6일 현충일과 6월25일 한국전쟁이 포함된 달이라 그렇다. 호국(護國)이란 나라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의미다. 보훈(報勳)이란 공훈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즉, 나라를 위해 숨진 영령과 공훈을 세운 이들을 대접하고 애국심을 되새겨 보자는 달이다.

그래서인지 6월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굵직굵직한 국가적 사건사고가 부지기수로 많다. 6.10민주항쟁이나 6.25전쟁을 제외해도 그렇다. 6월은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그야말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점철된 역사로 그득하다.

특히 이번 주에 해당하는 13일부터 18일까지가 그렇다. 1950년 6월18일 김일성은 북한군에 전투태세 완료 명령을 하달했다. 25일 새벽부터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이 발생하는 12시간 뒤, 밤 10시까지 1127일간 동족상잔 비극의 기점이었다.

그 원흉이 속죄할 양 기쁨을 주려했는지 1994년 6월 17일 평양을 찾은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과 만나 '남북정상 회담'에 동의를 표했다. 김영삼 대통령 재직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21일 뒤인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함으로써 성사되지 못했다.

1998년 6월 16일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 500마리를 이끌고 방북 길에 올랐다. 전 세계에 생중계된 소 실은 차량행렬 모습은 뇌리에 아직 생생하다. 김정일 정권 4년 뒤의 역사다. '소 한 마리 판돈 7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나왔던 실향민 정주영의 속죄하는 의미였다.

이른바 ‘통일소’가 즐거운 마음으로 분계선을 넘었음에도 이듬해인 1999년 6월15일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제1차 연평해전이다.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영해를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해군의 고속정이 선체를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태였다.

남북 긴장상태가 한껏 높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이듬해에는 남북한 민족 모두가 꿈과 희망을 품었을만한 획기적 역사 사건이 일어났다. 남북분단 후 처음 열렸던 남북 정상회담이다. 2000년 6월13일부터 6월15일까지 2박3일간 평양에서 열렸다. 온 세계가 주목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등이 담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김 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해 김 위원장과 만나는 장면은 실시간 중계돼 세계인의 가슴에 큰 반향을 주었다.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을 달군 주요 국제뉴스로 자리매김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독일 통일’처럼 통일국가를 기대하며 한반도의 찬란한 미래를 꿈꿨던 6월이기도 했다.

헌데 오늘날의 6월은 기쁨과 즐거움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화나고 슬픈 일 뿐이다. 희망은커녕 미래마저 아득하게 느껴진다. 세상 돌아가는 세태를 보고 듣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민다. 위정자가 옆에 있다면 ‘제대로 해!’하며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다. 후덥지근한 6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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